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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8. 2023

찰나를 그려가는 예술

당구장에서 ~ 45

스리쿠션보다 까다로운 녀석이 또 어디 있을까. 득점하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인간사의 모든 의미를 담아내고 있대도 과언이 아니다. 얼핏 단순함을 요구하는 운동 같지만 머릿속은 당구를 의식 속에 집어넣으려 한다. 아니 사회가 그 속으로 밀어버린다는 표현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복잡함을 만들어가는 세상사처럼 말이다. 의식은 곧 의미로 전환되어 감정의 연결고리가 생성된다. 너와 나, 나와 당구의 관계 때문이다. 너무도 잘 알기에 동물적 감각에 의지하려 애써보지만 주로 의식을 이겨내지 못한다.

 

어쩌면 감각과 의식의 경계에서 승리를 추구하는 스포츠가 아닐까. 마음속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다독여 정화된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 칠 때마다 기쁨으로 가득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미련을 더 많이 안겨주는 스리쿠션. 그래서인지 승리할 때면 기쁨이 배가 된다. 기량도 기량이지만 응어리를 누그러뜨리는 일은 힘들다 못해 지극히 고된 작업이 된다. 근육마저 응어리지기 때문이다. 길이 훤히 보이지만 감정의 연결고리 속에 가려져 흐릿하기만 하다. 걷어내면 알 수 없는 기운이 엄습하고 또 엄습하고.


평소보다 더 엎드려도 안 되고 덜 엎드려서도 안 된다. 브리지의 길이를 조금이라도 길게 쥐어도 안 되고 짧게 쥐어서도 안 된다. 그립 쥔 손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높이 들어도 안 되고 낮춰서도 안 된다. 맞는 순간 들숨 날숨을 쉬는 것도 안 된다. 당점이 틀려도 안 되고 벗어나도 안 된다. 깊숙하게 밀어도 안 되고 짧게 내밀어도 안 된다. 너무 세게 쳐도 안 되고 약해도 안 된다. 팁의 강도도 내게 맞춰 항상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며 비트는 동작은 말할 것도 없다.


행위에서 조각가의 모습이 비친다. 친다는 당연함을 더해 빚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큐를 들고서 원하는 두께로 성큼 잘라낸다. 얇게 아주 얇게, 두껍게 아주 두껍게 말이다. 가르는 게 쉽지만은 않다. 조각도를 쥔 손은 힘 안 들이고 편안해야 한다. 긴 호흡을 가다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악기 다루듯이 어루만지기도 한다. 그립 쥔 손은 언제나 바쁘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중심선을 찾기 위해서다. 확실하게 결정한 후 만족할만한 스트로크가 준비되었다면 지체하지 말고 내밀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너무 빨리 쳐버린다면 소리부터 달리 들려온다. 느낌으로 미리 전달되어 실패했다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복잡함이 더해진다. 칼 든 주방장이 되어 인간사의 감정을 요리하는 시간이다. 단 하나의 주어진 재료 ‘긴장감’을 가지고 느낌을 통제해야 한다. 성실하게 노력하여 얻은 ‘앎’이라는 양념으로 얼마만큼 맛있게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용의주도하고 치밀하게, 신중하고 섬세하게 섞어야 한다. 앎 속에는 물들지 않은 천진난만함 · 청순미 · 진실 · 순수함이 고여 있다. 맛을 돋우려 적절하게 MSG를 섞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요리가 완성되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림 속 하나하나에는 땀방울이 망울망울 맺혀 있다.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득점하는 매 순간은 경이로움이다. 일련의 작업만으로도 가히 예술이라 칭할 만큼 눈부실 정도다. 여기에 예술성이 더욱 돋보이려면 역시나 난구에서 발휘되는 구사력이다. 난구를 바라보는 표정이 너무도 태연한 모습이다. 성공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다음 포지션을 그려간다. 하이런으로 이어지니 이보다 더한 만족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잘난 체해서도 안 되며 겸손을 잊지 않는다. 모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단정한 예의로 품위를 갖추고 절조 있게 행동하는 모습조차 자연스럽다. 서로의 존중으로 이어진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명예를 받아들이는 일만 남게 된다. 당구란 세상사 모든 의미를 구속하여 내 것으로 만든 후 능수능란하게 펼침으로써 우아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작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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