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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Feb 08. 2024

돗대

당구장에서 ~ 50

'돗대'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를 통속적으로 이른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당구에서도 마지막 한 점을 돗대라고 불렀다. 아울러 '돗대 매너'라는 말도 생겨났다. 연속해서 치다가 한 점 남기면 매너 좋다는 칭찬을 받고 남은 점수를 다 쳐버리면 매너가 없다며 핀잔 듣기도 한다. 물론 농담으로 오가는 말이다. 시합은 규정상 침묵을 요구하기에 입 뻥긋하다가는 큰일 날 소리가 된다. 함부로 꺼낼 수 없는 농담 속에 꼭 꼭 숨어있는 인간의 심리, 머리카락 보일까 두렵다.  


찌르고 찔리고 찌르고 또 찌르는 승부의 과정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한 번 더 찌르면 상대가 쓰러진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다. 연타 날려 마무리 짓고 싶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의식하는 순간 난데없이 눈앞에 먹구름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의도치 않게 매너 지키는 경우가 더 많다. 신중하게 쳐도 마찬가지다. 손쉬운 포지션이래도 의식의 크기만큼 실수를 안고 가야 하는 돗대의 마술, 어쩌면 인간사의 일일지도 모른다.


다시 기회가 온대도 쉽게 마무리 짓지 못한다. 상대선수의 의지가 클수록 풀어내기가 녹록지 않다. 야금야금 쫓아오는 모습을 쳐다보노라면 별별 생각마저 든다. 어쩔 땐 심장 멎을 정도로 긴장감을 몰고 오기도 한다. 점수차가 벌어져 포기한 느낌을 건네주면 끝내지 않고 살살 장난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러다 앗차! 하는 순간 발목 잡히기도 한다. 방심하지 말고 끝내야지 하면서도 실수하고 마는 오금 저린 기운. 지고 나면 표정관리조차 안 될 정도로 자괴감마저 든다.  


거의 모든 스포츠가 주어진 시간 안에 빨리 · 많은 점수를 얻어야 하지만 당구는 다르다. 정해둔 점수를 두고서 먼저 득점하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혹시나 싶어 올림픽 종목을 유심히 살펴보니 펜싱도 당구와 흡사한 방식이다. 둘 다 찌르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칼로 상대를 찌르고 큐로 공을 찌른다. 직접 찌르고 간접적으로 찌르는 야릇한 기운이 몰려오는 것은 왜일까.


너와 다름은 찔러서 피 흘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투에서 전쟁으로 전쟁에서 스포츠로 변모한 펜싱과 더불어 당구도 인간의 곁을 줄곧 지켜왔다. 마구잡이식 결투에서 찌르는 형태로 변모하게 된 배경은 프랑스다. 공교롭게 당구의 오래된 흔적도 이곳에서 단서가 발견된다. '*합법적 살인을 저질렀던 기사들과 진검으로 승부하는 당구쟁이의 삶' 속에 숨어 있는 나는 무엇인가.


기사도 정신에서 실마리가 보인다. 그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신사도에 이견을 달지 못한다. 당구에서도 신사도를 앞세운 이유가 이제는 더 이상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사들의 결투에서 게임 방식이 만들어졌다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많이 득점한 선수가 이기는 경기였더라면 당연히 돗대의 의미도 사라지게 된다. 정해둔 점수는 목숨값이며 야릇한 기운은 마지막 순간에 몰려오는 생명의 감정이 아닐까.


젊은 친구와 매칭되어 경기를 치른 적이 있었다. 어디서 공을 배운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수가 꿈이란다. 시원스러운 모습에 매료되다 보니 어느새 친구의 점수가 한 점 밖에 남지 않았다. 역시나 매너를 지키고 있다. 마지막 양심일까, 방심일까. 다음 타석이 되어도 맞춰내지 못한다. 또 실수하고 실수하고. 몇 번을 주고받거니 했다. 겨우겨우 마무리 짓더니 겸연쩍은 미소를 내게 보인다. 큐를 풀며 한마디 건네줬다. 당구 잘 치려면 돗대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끝맺으라고. 아니면 내가 죽는다라고.




*다윗 윤리 : 그가 칼을 차고 있는데, 그것으로 흠잡을 데 없이 피를 흘리며, 피의 사람이 되지 않고, 종종 살인이라는 누명을 쓰지 않고 사람들을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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