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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지 May 06. 2024

엄마는 어떻게 스카이 대학에 갔어요?

나는 우연한 기회에 잘 받은 성적표 하나 덕분에 스카이 대학에 가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방 한구석에서 소설책 읽기를 좋아하던 아이였다.


학교에서는 존재감 없는 아이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이 초 2때 성적 뒤에서부터 10명을 호명하는데 그 중에 내가 있었다. (당시 한 반에 60-70명)


설마...잘못 들었겠지.


현실부정을 하며 대충 넘어갔지만, 엄마한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다니던 곳은 강남의 모 초등학교였는데 규율이 엄격하고 선생님들도 넘 무서웠다. 지각하면 교문 앞에서 이름 적히고 벌을 서야 했다. 이사가는 바람에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녀야했던 나는 아침에 버스가 늦게 올 때면 발을 동동 구르곤 했다. 상장은커녕 칭찬 한번 받아본 적 없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암울한 기억 뿐이었다.


학년이 바뀌고, 나는 이사간 곳 근처의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때의 해방감이란.


새로운 학교는 신생학교답게 최신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활기차고 밝은 분위기였다. 전학온 나에게 ‘공책정리상’, ‘경필쓰기상’ 등 신기한 이름의 상을 2개나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두 과목은 ‘미’이지만 나머지 과목은 ‘수’, ‘우’를 받는 아이가 될 수 있었다.  




새로 이사간 곳은 참 특이한 동네였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급 아파트와 판자촌, 양 극단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나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애매한 ‘단독주택’ 출신이었다.


아파트 사는 여자애들은 주로 패거리를 지어 다녔는데, 우리 반 남자아이들은 마당쇠들마냥 걔네들을 ‘아파트 아가씨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반마다 판자집 사는 아이들이 2-3명 쯤 있었는데 주로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단독주택에 살던 나는 중간자적 입장에서 양쪽 세계를 오갔는데, 둘다 사뭇 충격적이었다.


고급 아파트에 놀러갔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고상한 옷차림을 한 전업주부 엄마가 만들어준 '수제 짜장면'이었다. 어떤 친구네 집에 갔더니 '올화이트'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었다. (35년 전이다...) 또 어떤 집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농구장만한 거실이 있었다.


판자집에서 놀러가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자물쇠가 채워져있던 전화기였다. 그 때 전화 한 통 기본요금이 100원이었던가, 200원이었던가...? 싸진 않았지만 자물쇠라니…! 집에 어른은 없거나, 아파서 한구석에 누워계셨다.


빈부 격차의 현장에서, 나는 주로는 단독주택 아이들과 놀았지만, 가능하면 아파트 아가씨들 쪽에 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러나 판자촌 아이들과도 어울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내 인생의 기회는 너무 희한하게, 약간은 코믹하게 찾아왔다.


담임은 나이드신 여자 선생님이었다. 당시 부모님은 고가 제품을 판매하셨는데 선생님은 가정환경조사서를 통해 그 사실을 아셨는지, 나를 통해 몇 차례 물건 구매를 부탁하셨다.


한 번은 나를 불러내어 구매할 제품 내역을 대충 메모지에 적어 부모님 갖다 드리라고 하시더니, 조금 후 다시 불러서는 그 메모지를 ‘나뭇잎 모양’으로 정성껏 오려주시는 것이다.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이 핵심기억으로 남는 걸까?


어쨌든 이 분이 내 인생을 바꿔주셨다.


아마 지금도 모르실거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한 사람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실을...




당시 부모님 가게 근처에는 약국이 있었는데 엄마는 약사 아주머니랑 친하게 지내셨다.


어느 날 이야기하다보니 우리 학교 교감 선생님이 약사 아주머니의 친구인 것이다. 약사 아주머니는 교감 선생님한테 내 이름을 알려주었고, 교감 선생님은 우리 반에 오셔서 “이 반에 ㅇㅇㅇ가 있냐, 누구냐”고 나를 불러 일으켜세우셨다. 그리고 반 친구들 앞에서 나를 잘 부탁한다고 담임쌤에게 말씀하셨다. 그 후에도 한두번 더 찾아오신 것 같다.


그 이후 내 인생이 바뀌었다..


부모님이 아무리 물건을 싸게 해드려도 별다른 감흥이 없던(오히려 실망한 느낌?) 선생님이 교감쌤 다녀간 후로 나를 티나게 예뻐하기 시작했다. 반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였던 내가 어느날 갑자기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교감 선생님 파워가 그렇게 쎈 줄은 그 때 알았다. 아무튼 이후 담임쌤은 독후감이다, 글짓기다 무슨 상을 줄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챙겨 주셨고 급기야 학년말에 나에게 all ‘수’를 주셨다.


그 때 깨달았다. ‘수우미양가’에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었구나.


올 ‘수’를 받은 덕분에 나는 이듬해 반장 선거 후보에 올랐고 ‘아파트 아가씨들’ 패거리에 반감을 갖고 있던 판자촌+단독주택 아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반장이 되기에 이른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느냐고?


한번 ‘올수’, ‘반장’으로 낙인 찍히니, 그 달콤한 굴레를 벗어나기가 싫어졌다. 나는 주위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계속 열심히 공부를 했고, 마침내 스카이 대학에 가게 되었다.


결국 내 인생을 바꾼 것은,

나에게 올 ‘수’를 준 담임 선생님,

담임쌤에게 나를 부탁한 교감선생님,

교감쌤에게 나를 부탁한 약국아주머니,

약국아주머니랑 친하게 지낸 우리 엄마였다.



* 사진 출처 : 나무위키  

(상기 글 내용과 관련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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