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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나나 Oct 03. 2023

글쓰기모임-성해나 <화양극장>

이상한 인연

어느 여름날의 바람 한 줄기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일본어 수업을 위해 잰걸음을 바삐 움직인다.

저녁때라 아이들 밥 챙기느라, 화장하고 옷 입느라 정신이 없다.

봄부터 시작한 수업은 어느새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어 한낮의 무더위를 모아놓았다가 한 번에 쏟아붓는 듯 후덥지근한 열기는 나의 급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후끈 불어온다.

헐레벌떡 강의실에 도착하자 "오셨어요? 힘드시죠?" 하며 잔잔한 웃음을 보이는 남자 선생님과 

"언니, 좀 일찍 와~"라고 퉁명한 소리를 내는 명숙이가 나를 맞이한다.

인기가 없는 분야인지, 아님 홍보가 부족한 탓인지 수강생은 달랑 두 명뿐이다.

그런 덕분에 우리 세 명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수업이 끝나면 공부를 엄청 많이 한 것처럼 힘들어하며 맥줏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미용실을 하는 명숙이의 고객에 대한 불평불만의 단골 멘트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밤인데도 식을 줄 모르는 더위와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크~ 캬~ 골까지 띵하다. 일주일의 피로가 한꺼번에 물러나는 순간이다.

달큼하게 취한 우리는 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한 잔씩 손에 들고 밤거리를 헤맸다.

사회에서 만난 사이이지만 예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허물이 없었다.

장난으로 별명을 지어주면서 깔깔대며 걷기도 하고, 공원에 앉아 음악에 맞춰 몸을 살살 흔들어대며 서로의 모습에 자지러지기도 했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여름밤, 우리 곁으로 기분 좋은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왔다.




왜소한 몸집에 귀를 쫑긋 세워야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 하지만 몇 달 뒤에 있을 나의 첫 시험을 위해 여러 가지 자료를 준비해 주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쓰시던 전자사전까지 선뜻 내주는 섬세하고 자상한 선생님.

교정기를 껴서 활짝 웃지는 못하지만 귀여운 말투와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해서 웃음을 자아내는 명숙이.

두 사람 덕분에 나는 또 한 번의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다.

일본어 능력 시험 3급 합격 소식에 선생님은 현수막이라도 걸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며 기뻐하는 반면, 명숙이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축하한다는 말 뒤에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명숙이는 일이 바빠 시험을 보진 않았다. 하지만 다음번에 시험을 보면 꼭 붙을 것이라는 우리의 위안은 먹히지 않았다. 그때부터인가, 명숙이는 툭하면 짜증을 내고 약속도 어기기 일쑤였다.

반복되는 명숙이의 제 멋대로인 행동에 선생님과 나는 티를 내지는 못했지만 점점 불만과 불신이 쌓이게 되었다. 그 좋았던 일 년여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우리의 관계는 서서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 뒤로 일 년 후 2급은 3급과의 갭이 커서 두려워하는 내 마음속으로 선생님이 해주신 말들이 들어왔다.

"나나님은 충분히 해 낼 수 있어요. 지금까지 한 대로만 하면 문제없어요. 잘하고 있어요."

덕분에 또 한 번의 합격을 맛보았고 누구보다도 먼저 선생님에게 합격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나보다 더 기뻐하실 선생님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셋 일 때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둘일 때는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

성별이 다른 우리가 친할 수 있었던 것은 둘도 아니고 넷도 아닌 셋이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문득 선생님이 주신 전자사전이 떠올랐다.

핸드폰 사전 앱을 쓰게 되면서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전자사전은 건전지가 녹이 슬어 노랗게 진물이 흘러나왔고 새 건전지로 교체해 봐도 더 이상 작동되지 않았다.

전자사전이 마치 우리의 관계인 것 같아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는 달큼하고 기분 좋은 바람 한 줄기는 불어오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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