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하다]권력감시
이승만은 귀국 직후 한때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었다.
미국에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적대·비판적이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매일신문 1945년 10월 26일자에는 이승만이 이렇게 말했다고 보도됐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승만은 윤석열처럼 뚜렷하게 확립된 이념이나 철학.사상 같은 것이 없었다. 미 군정이 조선공산당 등 공산계열을 불법화하면서 탄압하는 국면에 이르자, 이승만은 극렬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이승만은 조선공산당이 독촉을 이탈하자 12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방송에서 독설을 퍼부었다.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했거니와 우리가 공산주의를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 국렬파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 이분자들은 노국을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서 저희 조국으로 돌아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21일 자.>
이승만은 정권을 공고히하고 경쟁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반공을 이용했다.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를 해체할 때도, 정적인 조봉암을 견제할 때도 반공을 내세웠다.
윤석열도 반공을 잘 이용했다. 위기가 있을 때마다 반국가세력, 공산전체주의 세력, 국정문란세력 등의 표현으로 야당과 진보진영을 공격하며 이념대립을 부추겼다.
윤석열은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반국가세력을 저격했다.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 전체주의가 대결하는 분단의 현실에서 이러한 반국가세력들의 준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8월 19일 을지 국무회의에서는 반공의 수위를 높였다.
“허위 정보와 가짜뉴스 유포, 사이버 공격과 같은 북한의 회색 지대 도발에 대한 대응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북한은 개전 초기부터 이들을 동원하여, 폭력과 여론몰이, 그리고 선전, 선동으로 국민적 혼란을 가중하고 국론 분열을 꾀할 것이다.”
비상계엄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며 지난 12일 내놓은 대국민 담화에서 역시 반공이 빠지지 않았다. 반국가세력으로 인해 계엄이 불가피했다는 궤변도 함께였다.
“(야당은) 지난 정권 당시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박탈한 것도 모자라서, 국가보안법 폐지도 시도하고 있습니다.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간첩을 잡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북한의 불법적인 핵무장과 미사일 위협 도발에도, GPS 교란과 오물풍선에도, 민주노총 간첩 사건에도, 거대 야당은 이에 동조할 뿐 아니라,오히려 북한 편을 들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부를 흠집내기만 했습니다.”
윤석열과 이승만은 친일을 했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이승만은 국내에서 친일파 청산에 반대하고 되레 이들을 중용하면서, 때로는 대단히 우호적인 태도를, 때로는 극렬한 반일주의자처럼 보였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22일 이승만이 발표한 성명이다.
나는 일본과 한국에 정상적인 통상관계가 재확립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과거를 망각하려 할 것이며, 또한 망각할 것이다. 만일 일본인이 한국인을 진정으로 대한다면 우호관계가 일신될 것이다. 우리는 인방국과는 평화리에 생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일본인들은 그들의 심각한 제체험에서 여사한 교훈을 얻으리라고 믿는다. <공보처,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183쪽, 공보처, 1953.>
갓 독립한 나라의 초대 정부수반으로서 첫 일본 관계 발언으로는 참으로 부적절한 언사다. 최소한 사과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을 9년 6개월 동안 네 차례에 걸쳐 한일회담을 열었지만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미국으로부터 연간 2~3억 달러 경제원조를 받고 있어서 당장 일본 자본 유입의 시급성을 느끼지 않았을뿐더러 이승만이 한일회담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은 정치적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
이승만은 그의 실정과 비민주성에 대해 국민의 시선을 돌릴 수 있는 민족적인 속죄양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 정권의 강경한 대일정책이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강경 대일정책과 한일회담 실패는, 미국으로 하여금 4.19 당시 이 정권의 퇴진압력을 가하게 되는 한 용인이 되었다. 이 정권 시대에 끝내 타결을 보지 못한 한일회담 문제는 곧 민주당에 그 짐이 넘겨지게 되었다. <이재오, 한일관계사의 인식 1, 학민사, 1984, 52쪽>
이승만이 일본과 회담을 진행할 때는 한국이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비록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에 한국이 참여하지는 못한 상태였으나, 일본은 전범국이었으며 미국은 소련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한일회담을 통해 국교정상화를 촉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한일회담을 국내정치에 활용함으로써 식민통지 35년에 대한 정당한 청구권 요구 등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실책을 빚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 출신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대규모 투자재원을 확보할 목적으로 한일회담을 서둘러 졸속 추진하면서 무상공여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라는 터무니없는 헐값에 대일청구권을 팔아넘기게 됐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를 ‘친일파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이승만 집권기 국무총리 이하 정부 각료는 연인원 115명이다. 재임 또는 2부 이상 각료를 역임한 19명을 빼면 실제 인원은 96명이다. 이중 독립지사 출신은 12명(12.5%)에 불과하다.
특히 일제강점기치하에서 관제기관 위원(장면), 지방법원 판사(조용순)를 지낸 부일협력자들이 국무총리, 대법원장까지 했다.
부일협력 전력자는 30명(31.3%)이나 된다. 직계혈족 중 극히 현저한 친일행위가 있던 인사 3명까지 포함하면 34.4%나 된다.
사법부 부일협력자는 비율이 더 높다. 이승만 정권 2명의 대법원장과 17명의 대법관 중 부일협력자는 13명으로 무려 68.4%에 달한다.
윤석열 또한 노골적으로 친일행각을 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대한민국 대법원이 일본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했음에도, 정부는 ‘제3자 변제’라는 배상안을 내놨다.
일본의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기만적으로 합의하고, 요직에 뉴라이트 인사를 앉혔다. 윤석열 뉴라이트 단체 출신인 김영호 통일부장관과 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을 임명했다.
또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한오섭 전 정무수석 등 뉴라이트 운동에 관여한 인사들을 정권 곳곳에 포진시켰다.
지난 8월에는 친일 뉴라이트 인사로 구분되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을 임명했다. 관련기사 : [두 개의 동상] ③ 이승만 우상화, 뉴라이트 활개칠 때마다 부상
윤석열은 지난 5월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한일 관계에 대해 “여러 현안이나 과거사가 걸림돌이 될 수는 있지만, 확고한 목표 지향성을 가지고 인내할 것은 인내하면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홍봄 기자 spring@newshada.org
이창호 기자 ych23@newshada.org
참고문헌_이승만 평전_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독부 윤석열과 이승만] ② 친일과 반공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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