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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철 Oct 09. 2023

잡문본색 8

해마다 한글날이면 가슴이 아려온다 

때는 90년대 후반.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괜스레 고개가 빳빳해지고 초등학교라는 굴레에 슬슬 권태가 느껴져서 숙이는 법을 모르는 데 적응이 되어갔다. 꼭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가 아니더라도 그만한 인물은 어느 초등학교 5학년 사회에서라도 나올법한 분위기였다. 어차피 6학년들이야 어떤 식으로든 티가 팍 나게 마련이니 조금만 주의하면 운동장에서든 교내에서든 달갑지 않은 애들한테는 함부로 “야, 야!” 할 수 있는 나이 5학년. 그 맛을 느끼라고 초등학교를 6년이나 다니는구나 싶었다. 군림할 수 있는 세월이 2년뿐이라는 생각에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새롭게 맞이하는 담임선생님에 대한 설렘이나 긴장, 이런 어휘와도 멀어지는 나이가 5학년이다. 이미 어지간한 교내 선생님들은 다 아는 나이니까.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바로 우리 같은 경우였다. 새로 발령받은 학교로 오게 되어 바로 담임으로 부임받은 선생님. 그야말로 뉴 페이스. 우리들은 레이더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뒷짐 지고 차분한 걸음걸이는 급한 성격이 아님을, 거무튀튀한 얼굴색에 갈라진 목소리는 지고지순하고 온화한 성격은 아님을, 우리들 얼굴 한 명 한 명을 찬찬히 쳐다보는 눈빛은 1년 동안 자유방임 주의 및 방목하게 두지는 않을 것임을 의미했다. 다만 한 가지, 한복만큼은 레이더에 잡히지를 못했다. 그냥 나처럼 집에 옷이 별로 없나 보구나 했다.          

   

“너희는 앞으로 많은 나라의 말과 글을 배워야 한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우리말과 글을 똑바로 쓰고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너희들은 한글을 다 아느냐?”          

   

<쓰기> 수업 시간에 책도 펼치기 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나 참. 몇 번 틀리기는 했어도 받아쓰기 뗀 지가 언젠데 한글을 다 아느냐고... 우리 나이가 몇인데 너무 무시하시네. 말만 이렇게 안 했을 뿐이지 나를 포함해 우리들 얼굴은 다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썩소라는 것을 이 날 선생님 표정을 보며 제대로 뭔지 알았다.          

   

“지금부터 ㄱ부터 ㅎ까지 니들이 소리 내는 대로 그대로 써본다. 다 맞힌 사람한테는 청소 당번 면제!”          

   

오옷!@@ 12살 인생 살면서 어차피 내일도 더러워질 거 오늘 왜 해야 하나 늘 궁금했던 청소라는 것을 빼준다니! 거절할 수 없는 제안. 보란 듯이 다 맞혀주겠소이다!          

   

‘기억. 어라? 기역인가? 혹시 기윽? 아니다. 그건 아냐. 기억 아니면 기역인데... 아쒸. 인생 최대의 고민인 50% 확률. 일단 패스.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지읒? 혹시 지읓? 치읓? 아 놔. 키윽? 키읔? 아니면 이것도 키억? 따쉬... 티귿? 티읃? 티읕? 하악하악;; 피읖; 히응? 히읗? 아닌데 히읗같은 글자가 있을 리가... 아햏햏도 아니고...’          

   

12살이라는 나이에 나는 다니던 성당을 그만 다녀야겠다 굳게 다짐했다. 하느님이 이토록 시련을 주실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오답이 매력적일 줄은 12번을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수십 명의 우리들 중 단 한 명도 다 맞은 애는 없었다. 당연하지. 이건 고대 이집트 문자 해독하는 사람들이나 맞힐 수 있을 게야.라고 위안을 삼기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믿고 싶지 않은 충격이었다. 글 좀 쓴다고, 글씨는 엄청 잘 쓴다고 왕왕 칭찬받던 나건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우리 글자도 제대로 못 쓰면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뇨...     

   

나만 충격을 느낀 건 아니었다. 우리들 중 몇 명은 심각한 자괴감에 이 엄청난 사건을 집에 보고했고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학부모님들의 교육 관련 수사력은 실로 대단해서 도대체 이 선생님은 어떤 선생님인가를 발 빠르게 조사하셨고 <날지 못한 천 마리의 학>, <살아있는 말치마을> 등 몇 권의 어린이 소설과 동화집을 쓰신 작가라는 신분이 드러났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하지만 뭐 이렇다 할 것은 없었다. 이 역시 예나 지금이나 작가 출신 교사든 교사 출신 작가든 일반 사람들한테는 별 감흥이 없다. 이들이 감흥을 주려면 교사라면 학생들을 이름만 대면 감탄할 학교에 보내거나 작가라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작품을 썼어야 한다.          

   

“선생님, 저 글 진짜 잘 쓰고 싶은데 좀 도와주세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수업이 다 끝나고 책상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께 가서 드린 한 마디. 막연했지만 진심이었기에 선생님께 가기까지 긴장으로 옮긴 발걸음 하나, 설렘으로 옮긴 발걸음 하나까지. 선생님의 대답도 물론 기억한다.          

   

“나야말로 글 좀 잘 쓰고 싶다. 네가 좀 도와다오.”          

   

껄껄껄 웃으셨지만 12살이 듣기엔 멘붕을 주는 대답이셨다.          

   

그렇게 매일같이 선생님과 수업이 다 끝나면 글을 한 편씩 쓰고 집에 갔다. 어떤 날은 선생님이 얇은 책 한 권을 주시면서 이걸 다 그대로 원고지에 옮겨 쓰고 가라고 했다. 선생님은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을 싫어하셨다. 깜빡깜빡거리는 것을 보고 앉았노라면 떠오르는 생각도 깜빡깜빡 잊어버린다고 컴퓨터로 작업을 해야 할 때도 있는데 그 때문에 부숴버린 컴퓨터도 세 대 정도 된다고 했다. 글을 잘 쓰려면 힘이 쎄야 하구나 싶었다. 확실히 팔힘은 좋아야 했다. 수십 페이지가 넘는 글을 그대로 원고지에 연필로 사박사박 써 내려가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집에 저녁 8시 좀 넘어서 들어갔던 적도 있다. 아빠가 먼저 퇴근해서 집에 계셨던 적도 적지 않다. 예술을 하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 굶어 죽기 전에 기운 빠져 죽을 거 같았다. 당시 내가 필사했던 글들은 대부분 故이어령 선생님 글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분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 그저 이어령=악마일 뿐이었다.          

   

“사람은 책과 같아야 한다. 언제 봐도 똑같고 한결같아야 한다. 여기저기 옮겨 다닐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런 책과 같은 사람이 되려면 당연히 책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너네들 수업 끝나고 집에 바로 가기 싫지? 도서관으로 가라. 놀아도 도서관에서 놀아라. 그러면 글자 하나라도 어쨌든 더 읽게 되고 습관이 되면 나중에라도 분명 도움이 될 거다.”          

  

당시만 해도 학교 끝나고 바로 학원으로 가는 친구들은 드물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20년이 더 지나서야 이때 선생님 말씀을 실천하고 살았다. 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건 지금이라도 사과드리면서 “그래도 선생님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하고 산답니다” 하고 말씀드릴 선생님이 계시질 않는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마치셨다. 간암 투병 중이셨는데 요양원에 계셨고 사모님과 가족분들 말씀으로는 치료하면 충분히 나을 수 있었는데 한사코 고집을 피우셨다고 한다. 평생을 글밥만 먹고살면서 여러 사람 힘들게 했는데 그 목숨 더 살자고 그 사람들 더 힘들게 하는 게 사람이냐고 오히려 역정까지 내셨다고 한다. 충분히 상상이 갔다. 글 안 써진다고 컴퓨터를 세 대나 부순 괄괄한 성격이 하루아침에 어디 가겠는가. 언어에는 우열이 없지만 문자에는 우열이 있고 그중에서 한글이 단연 세계 최고라며 그런 문자를 주인으로서 쓰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선생님. 유난히 영어를 많이 섞어 쓰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 자식들 아직 사람 되려면 멀었어” 하시던 선생님. “그래도 초딩을 집에도 안 보내고 연필 한 자루가 거의 닳도록 글 쓰게 하셨던 건 너무하셨어요.” 하고 웃으며 술 한 잔 따라드릴 선생님. 그런 선생님이 지금 곁에 안 계셔서 해마다 한글날이면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온다.   


덧. <새 나라의 어린이> 노래에 맞추어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지읒, 치읓, 키읔, 티읕, 피읖, 히읗 모두 열넷” 이렇게 부르면 입에 짝 붙는다. 5학년 첫 국어 시간에 우리들한테 가르쳐 주시고 매일 수업 시작 전에 단체로 따라 부르고 수업을 시작하셨던 선생님의 모습도 해마다 한글날이면 아직 기억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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