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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Sep 01. 2023

샤인머스캣은 내 것 같지가 않아

내 건 미국산 씨 없는 청포도

며칠 전, 친정 엄마가 집에 잠깐 다녀갔다. 지난주에 아이가 제법 호되게 감기를 앓았는데 그때 못 챙겨준 것이 마음 쓰인다며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가져다준 것이다. 다른 것보다도 눈에 띈 것은 종이 상자에 든 샤인머스캣이었다. 엄마 손에 들린 상자를 보자마자 '어휴, 뭘 이런 걸 다!' 소리가 자판기 버튼을 누른 듯 절로 나왔다.


우리 집 냉장고에 과일이 없는 날은 거의 없다. 아이가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식구들 후식으로 그만한 게 없는 것 같아 장 볼 때마다 과일 한두 가지는 꼭 구입한다. 그중 계절을 가릴 것 없이 늘 냉장고에 들어있는 것이 포도와 방울토마토이다. 사과, 배도 식구들이 모두 좋아하지만 흐르는 물에 씻는 게 다가 아니라 칼을 꺼내 들고 손질해야 하는 게 번거로워 내가 손이 잘 안 간다. 포도와 방울토마토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볼에 알알이 쏟아 담고 식초 푼 물에 몇 번 헹궈두기만 하면 간편하게 먹을 수 있어서 만사 귀찮은 나에게 적당한 과일이다.



샤인머스캣이라니, 일 년에 몇 번이고 포도를 사지만 내 돈 주고 샤인머스캣을 사본 적은 없다. 색깔이 비슷한 미국산 씨 없는 청포도는 장바구니에 덥석 잘도 집어넣지만 샤인머스캣은 100g당 얼마인지 따져본 적도 없다. 비쌀 걸 아니까 아예 살까 말까 고민하는 대상에도 낀 적이 없다. 


친정 엄마 덕분에 우리 애가 샤인머스캣을 먹게 됐다. 생각해 보면 아이 입에 들어가는 샤인머스캣은 매번 친정 부모님 아니면 집에 드물게 찾아오는 손님이 사다 준 것이었다. 상자에 큼지막하게 네 송이가 들어있던 걸, 이틀 사이 다섯 살 아이 혼자 한 송이를 다 먹었다. 또 이틀은 먹겠네 생각하며 한 송이를 꺼내 굵은 가지를 잘라내고 식초 푼 물에 담가뒀다가 잘 헹궈 채반에 건져두었다. 씨 없는 청포도는 포장지에서 한 송이 꺼낼 때마다 포도알이 몇 개씩 후드득 떨어졌는데, 샤인머스캣은 어쩜 알맹이 하나하나가 어찌나 야무지게 가지에 붙어 있는지 한 알도 떨어지지 않는다. 알맹이 하나가 엄지손가락 한마디, 아니 엄지발가락만하다. '음, 정말 탐스러운 열매구만.' 생각했다.


적당한 용기에 샤인머스캣을 담아 옮기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지난 주말에 사둔 청포도, 방울토마토가 잔뜩이다. 게다가 같은 날 파격적인 할인가로 산 자두는 시들시들 죽기 직전이다. 새로 씻어둔 과일은 냉장고에 잘 넣어두고 며칠 묵은 과일을 꺼내 먹으며 네이버에 자두 샐러드 드레싱을 검색했다. 검색결과를 보니 대체로 비슷하구나 싶다. 자투리 채소를 한데 모아 올리브 오일에 뒤적이기만 해도 샐러드가 되는데, 만들어진 사연에 비해 샐러드라는 이름이 너무나 근사한 것 같다. 그 이름 덕에 좀 덜 궁상스러운 마음으로 자두 샐러드를 국수 사발 한가득 만들어 점심으로 먹었다.


아이는 아니나 다를까 유치원에서 돌아오자마자 포도를 찾았다. 냉장고 문을 열어 샤인머스캣이 들어 있는 통을 꺼내며 '이거 할머니가 주고 간 포도 맞지요?'하고 묻더니 '밥 먹어야 하니까 다 먹지는 마.' 하는 내 당부에 그 많던 것 중 딱 두 알을 남겨두었다. 퇴근하고 온 신랑이 식탁 위를 대강대강 치우고 있길래 '포도 남은 거 먹어.' 했더니 '아니야. 애기 줘.' 한다. 포도알 단 두 개도 입에 넣지 않는다니. 저건 내 것이 아니야 하는 마음이 나와 같은 건가 싶어 어쩐지 신랑이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번뜩 든 생각인데, 우리 엄마도 본인 입에 들어갈 몫으로 샤인머스캣을 사본 적이 없을 것이다. 상자에 네 송이 들어있던 거 중에 하나는 엄마 손에 들려 보낼걸. 엉뚱하게 냉동실에 소분해 둔 대형마트 제육볶음 따위만 실컷 보냈다. 엄마는 현관문을 나서면서도 '너도 좀 잘 챙겨 먹어.'라고 했는데 그 소리가 너도 샤인머스캣을 먹으라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엄마, 걱정 말아요. 샤인머스캣만 안 먹는 거지 끼니 한 번 안 거르고 얼마나 잘 찾아먹는지 몰라요.' 

우리 집 냉장고에 샤인머스캣이 있다. 내 입에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절반을 먹고도 커다란 걸로 두 송이가 남아있다. 그냥 그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흐뭇한 마음마저 드는 것이 참 웃기기도 하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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