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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Sep 25. 2023

직장생활로 자아실현 하기는 포기했습니다

돈 벌어서 빵이랑 커피 사먹으려구요

어느새 밥벌이 13년 차다. 그중에 이직, 번아웃, 임신과 출산을 앞세워 쉬어간다 친 세월이 모두 합쳐 2년쯤 되는데, 그 기간을 빼고도 월급이라는 걸 120회 이상 받았다고 생각하니 가진 재주에 비해 참 애쓰며 산 것 같아 스스로 대견한 마음이 든다.


며칠 뒤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입사한 지 꼭 3년이 된다. 내 경험상 직장 생활에서 3, 6, 9는 위험한 숫자다. 그다지 끈기 있지 않고 늘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는 내 성격 탓에 3개월을 주기로 직장 생활에서 권태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3개월에 한 번씩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여기까지 왔다는 점은 스스로 칭찬해 주고 싶다. 그런데 곧 3년 만근이라니, 요즘 나는 3, 6, 9 징크스에 지독하게 시달리느라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일에 대한 생각만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생각이라고 해봐야 사실 대단한 것이 없고, 몇 가지 자문자답이나 하면서 신세한탄을 하는 것이다. 대게 묻고 답하는 것은 이런 내용들이다.


나 지금 뭐 하는 걸까? 얼마 전까진 PR 매니저라고 나를 소개했는데, 회사 사정상 한시적으로 다른 업무를 맡게 되었다. 해본 적 없는 일이다 보니 종일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이게 맞아?’라는 질문을 수시로 한다. 일거리는 쏟아지는데 흥미도 성과도 없다. ‘저 언제쯤 원래 하던 일 할 수 있을까요?’ 묻고 싶지만 회사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이직을 할까? 나는 정말 간사한 인간이다. 경력과 상관없는 일을 맡게 되어 불만스러우면서도, 지금 직장에서 제공하는 편의를 포기할 수가 없다. 우리 회사는 재택근무와 유연근무제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다른 회사 채용 공고를 수도 없이 봤지만 이렇게 자유로운 근무조건은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곧 3년 만근에 대한 보상으로 곧 열흘간의 유급휴가를 쓸 수 있다. 5년 만근 하면 유급휴가에 해외 항공권까지 사주는 아량 넓은 회사다. 이런 걸 생각하면 권태로움 그깟 게 무엇인가 싶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마음을 고쳐먹는다. 


이렇게 골머리 앓을 바엔 이것저것 재지 말고 일을 관두는 건 어떨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을 꾸린 가족 구성원으로서, 내가 우리 가계 경제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몫이 있다. 대출 이자, 보험료, 관리비 기타 등등 세 가족이 숨만 쉬어도 새어 나가는 돈이 상당한데 이 모든 것을 남편에게 혼자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은 지난해에 홧김에 퇴사를 운운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남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20대엔 회사에서 일 잘하는 게 곧 자아실현이었다. 직장 생활이 내 전부인 것처럼 굴다 못해, 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굴러갈 듯이 갖은 유난을 떨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물론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오랜 친구가 안부를 물어오면, 잘 지내 한 마디로 답하면 될 것을 요즘 회사 일이 어쩌고 저쩌고 무용담을 늘어놓듯 답했다. 굳이 안 해도 될 야근을 일거리를 만들어서 하기도 했다. 주말엔 서점에 가서 직무에 관련된 신간을 읽고, 일요일 저녁이면 공연히 컴퓨터 앞에 앉아 다음 주에 할 일들을 미리 들여다봤다. 수면 부족, 만성피로를 달고 살면서도 일 열심히 하는 내 모습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다 권태로움, 번아웃을 느끼면 호기롭게 일을 관두고 한두 달쯤 놀다가 다른 직장을 찾아 들어갈 수도 있는, 비교적 자유로운 삶이었다. 


요즘은 일을 생각하면 조금 서글프다. 하필이면 3, 6, 9 징크스에 해당하는 3년 만근을 앞두고 회사 사정으로 인해 적성에 안 맞는 일을 도맡아 하게 되다니. 자아실현과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게 아니라 정말 돈 때문에 관둘 수가 없는 처지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계속해 신세한탄만 하고 있어 봐야 내 정신건강에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으니, 정신승리를 위해 일의 기쁨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일의 기쁨에 대해 적어보려고 얼마간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으로서는 돈을 벌기 때문에 기쁜 것이 전부다. 회사에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내는 대가로 돈을 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가정에서의 내 몫을 할 수 있다. 세 가족 부족함 없이 살림을 하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마켓컬리와 오아시스에서 새벽 배송을 받아보는 편의를 누릴 수 있다. 내가 느끼는 권태로움과 상관없이 회사에서 다달이 꼬박꼬박 입금해 주는 월급이 있어서 주말이면 훌쩍 여행을 떠나고, 빵과 커피를 사 먹고, 일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 책을 사 읽으며 최저한도의 문화생활을 할 수 있다.


‘자아실현은 무슨. 돈 벌려고 일하는 거지.’라고 인정하고 나니 홀가분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내 ‘이런 직장 생활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3, 6, 9 징크스는 올겨울에도 어김없이 나를 찾아올 텐데.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견뎌낼 수 있을까? 아마 나는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유치원비와 마켓컬리 새벽 배송을 생각하며, 빵과 커피 그리고 책 한 권 사는 즐거움을 생각하며. 그야말로 정신승리를 해내며 책상 앞에 목을 굽힌 채 앉아있는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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