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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Oct 26. 2023

로맨스보단 사건사고, 돌싱글즈보단 강철부대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그런 사람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도, 인스타그램 앱을 켜도 온통 영숙이었던가 영자였던가 하는 이름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요즘이다. 나는 솔로, 돌싱글즈를 티비 앞에 앉아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하림, 리키 등등 출연자의 이름과 얼굴은 익숙하다. 


내 주변 사람들만 해도 러브 버라이어티, 데이팅 프로그램을 안 보는 사람이 없는듯하다. 또래 친구들이 모여있는 카카오톡 채팅방에서는 연애 프로그램 방송 시간 내내 셀 수 없이 많은 메시지가 오간다. 공감, 분노가 섞인 메시지로 도배되다가 방송이 끝날쯤이 되면 현실 세계로 돌아와 내일 아침엔 무슨 반찬을 해 먹을 거냐는 질문에 답을 주고받다 마무리가 된다. 심지어 평소 나와 말을 많이 섞지 않는 지인 한 명은 '나는 솔로 16기는 꼭 봐줘, 제발!'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긴, 경제 뉴스와 부동산 정보, 스포츠 중계를 즐겨 보는 남편도 공연히 채널을 돌리다 나는 솔로, 돌싱글즈가 나오면 한참을 보고 있다. 내가 '딴 거 봐도 되지?'하고 물으면 '금방 끝나'하고 답하는 것으로 티비를 독점한다. 리모컨 버튼을 눌러 편성표를 보면 40분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정말 재밌긴 엄청 재미있나 보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시청하는듯한 연애 프로그램에 전혀 흥미를 갖지 못하는 나를 두고 '음, 정말 감성이라곤 씨앗조차 말라비틀어진 사람이군'이라고 스스로 평가한다. 하지만 내가 늘 이랬던 것은 아니다. 한때는(10년도 더 되었구나...)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프로그램을 본방 시간에 꼬박꼬박 챙겨보는 것은 물론, 재방송마저 보고 또 봐서 출연자가 하는 말을 외울 수 있을 지경이었다. 낯간지러운 애정표현을 하는 장면을 본 날엔 마치 내 연애를 회상하기라도 하듯 가슴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마주 잡은 채 침대에 누워 설렘을 만끽하다 잠들기도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취향이 달라진 걸까. 생각해 보니 아마 최근 4-5년 사이인듯하다. 결혼을 하고 얼마간은 연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출연자에게 조금이나마 공감하기도 했는데,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갈수록 타인 또는 낯선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피로도가 쌓인 상태라고 해야 할까.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다. 밥벌이해야 하는 직장인으로서, 집안 살림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주부이자 엄마로서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내가 충돌한다. 이 회사새끼라는 말을 달고 살다가도 월급 들어온 걸 보면 스스로가 너무 대견하고, 냉장고에 밑반찬이 똑 떨어진 걸 보면 한숨을 푹푹 쉬다가도 청소기 한 번 돌리고 집안 꼴이 제법 괜찮아 보이면 또 그런대로 기분이 나아진다. 들쭉날쭉한 내 마음 돌보는데 에너지를 많이 쓰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거나 감정을 이입해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루 평균 30분 미만으로 티비를 보는 나지만 요즘 본방사수하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바로 강철부대3. 특수부대 출신들이 부대별로 팀을 이뤄 경쟁하는 이른바 밀리터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패널을 제외한 출연자는 모두 남자이고, 남자라면 누구나 그렇듯 군대부심이 있는 사람들인데 특수부대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나는 군대문화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강철부대를 보면서 특수부대가 여럿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주변에 이 프로그램을 나만큼 챙겨 보는 사람이 없는데, 한 번은 지인에게 요즘 강철부대를 즐겨본다고 했더니 승리하면 출연자에게는 어떤 혜택이 있느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글쎄, 기분 좋음? 명예? 그토록 열심히 달리고 총을 쏘아대는 이유는 자부심과 자존심이 전부가 아닐까 생각이 들면서, 치열하게 전략을 세우고 때로는 마음보다 몸이 앞서는 사람들을 보는 게 내겐 약간의 희열이다. 


강철부대를 보면 드림팀의 구호가 떠오른다-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뒤끝 없이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소 부진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되 결과에 토 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 그 모습이 얼마나 쿨하고 멋져 보이는지! 달달하고 부드러운 로맨스는 1도 없는, 아주 뻑뻑하고 오직 전투력만이 상승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요즘 내겐 이만한 힐링 프로그램이 없다. 30대 중후반 여자가 즐겨본다기엔 너무 감성 터치가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강철부대가 너무너무 재미있다. 로맨스보단 사건사고, 돌싱글즈보단 강철부대. 또 기다려진다. 다음 주도 본방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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