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서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학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써 이름을 감출 정도로 후진 학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울 중심부에서 멀찍이 벗어난 변두리였지만 그래도 서울시로 시작하는 주소를 쓰는 대학교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인서울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며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물론 취업을 앞두고는 ‘더 이름난 대학에 입학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하는 공상을 펼쳐본 적이 있지만, 학벌을 속이고 싶다거나 속여야겠다는 마음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내게도 학벌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던 적이 딱 한 번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데, 엄마 아는 분의 딸이 쓴 자기소개서를 한번 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대학교 입시 원서에 넣을 서류인데 하필이면 자기소개서의 주인공이 해외 생활을 오래 해 한국어로 문장을 쓰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니, 명색이 책 좀 읽었다는 문학 전공자로서 좀 거들어주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내게 그 부탁을 하면서 ‘회사 일로 바쁘겠지만’, ‘그래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좀 도와줘야지 어쩌겠어’ 그런 말을 반복해 덧붙였던 것 같다. 나 역시 ‘오죽하면 나한테 부탁을 다 할까’ 싶어 알았다고 해두었다.
마침 자기소개서의 주인공이 직접 만나서 도움을 받고 싶다며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엄마는 ‘니가 좀 잘 봐줘’ 하고는 나와 그 친구가 있는 방에 과일 한 접시를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그 친구가 가져온 자기소개서는 A4 용지 네 장쯤 되었던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첫 줄을 보자마자 ‘만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냥 내가 처음부터 써서 보내준다고 할 걸’ 싶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기소개서 쓸 때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아니 어쩌면 열 가지에 언급되는 내용이 모두 들어 있었다. 심지어 첫 페이지 상단부터 ‘단란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으로 자란 저는……’ 이었다. ‘입시 원서에 들어가는 자기소개서는 약간 드라마틱해야지? 나는 널 모르지만 널 소개하는 글을 근사하게 새로 써주겠다’ 작정을 하고 약간은 열의에 차 흥분한 상태로 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몇 문장이나 새로 쓰고 고쳤을까, 그 친구는 아예 손을 놓고 내가 타이핑하는 모습만 초점 없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곧 엉뚱한 소리를 했다.
“언니는 연세대 합격할 때도 자기소개서 혼자 써서 냈다면서요? 엄마가 언니한테 잘 배워서 오랬는데, 제가 너무 못 해서 죄송해요.”
순간 나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머릿속에서 알고리즘이 펼쳐졌다. 몇 가지 추측과 의문이 빠르게 뒤섞였다.
‘이 친구는 내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줄 아는구나. 이 친구 엄마가 그렇게 얘기했구나. 하지만 그 분은 내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아시는데. 아니, 변두리 대학이라 이름은 모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연세대학교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아실 텐데. 대체 얘를 왜 나한테 보냈지? 지금 내가 자기소개서를 써주는 게 맞나? 나 지금 연세대학교 나온 거 아니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이상해지는 거 맞지?’
죄송하다는 그 친구의 말에 내가 ‘응’이라고 했던가 ‘아니’라고 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친구가 나도 모르게 위조된 내 학력을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공연히 눈꺼풀을 치켜뜨고 미간을 찌푸리기를 반복하며 손가락을 날쌔게 움직여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에 제법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연세대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찰나지만 두뇌회로가 멈춰버린 듯 눈꺼풀도 미간 주름도 작동하지 않았다. 곧 등이 뜨거워지면서 목 뒷덜미와 귓바퀴 뒤쪽까지 불쏘시개에 날카롭게 쓸린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손가락 끝이 점점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느껴지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무뎌졌다.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한 것 같아 바지에 문질러 닦아보았지만 축축한 흔적은 남지 않았다.
그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그 친구는 더 이상 학력위조가 탄로날만한 질문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의 자기소개서를 펼쳐두고 굳은 표정으로 자꾸만 오타를 내는 나에게 말 붙일 엄두가 안 났을 것이다.
마침내 자기소개서 작성이 모두 끝나고 그 친구는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엄마에게 “쟤는 내가 연세대 나온 줄 아는 것 같더라?” 하고 툭 던졌다. 엄마는 자기소개서의 주인공이 지금 막 우리집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 친구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분은 굳이 나를 바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나는 ‘아녜요, 힘든 일도 아닌데요. 저도 재미있었어요’ 같이 으레 하는 인사말로 응수하다가 말끝을 흐리며 연세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엄마의 지인은 “응. 내가 뻥튀기 좀 했어. 수험생한테 동기부여도 되고. 니가 워낙 잘 하니까.” 하고 넉살 좋게 둘러댔다.
다른 사람에 의해 내 학력이 위조되었던 건 당시엔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발끈하며 당장에 바로잡을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분은 내가 거짓 학벌 때문에 당황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딸 잘되길 바라는 악의 없는 거짓말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 뒤로는 자기소개서의 주인공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걔는 아직도 내가 연세대 나온 줄 알까? 아니면 시간이 흘러 사실을 알게 됐을까?’ 가끔 궁금하다. 지금은 내가 어느 대학에서 어떤 공부를 했는지도 잊고 지낸다. 학벌 그게 뭐라고, 잠시나마 남들 말하는 명문대학교 출신인 시늉을 했던 나를 돌이켜보면 지금도 등줄기에 불꽃이 이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