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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an 23. 2024

우정과 취향 그리고 주머니 사정

20년이 다 되도록 변치 않는 우리, 다 거기서 거기인 우리들

지난 주말에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대학 친구들을 만날 때면 늘 종로에 간다. 각자 이동하는 교통편을 따지면 강남 쪽에서 만날 수도 있는데, 그저 익숙하기 때문에 서로 의견을 묻지 않아도 매번 만남의 장소는 종로3가역 주변이다.


대학시절의 많은 시간을 종로에서 보냈다. 나뿐만 아니라, 희한하게 나와 잘 어울리는 친구 중에서는 강남 쪽에 사는 친구가 없었다. 강남역과 연결되어 있는 2호선을 따라 서울 주요 대학이 자리 잡고 있지만 우리가 다닌 대학은 그렇지 않았고, 큰 서점이 있고(문학 전공을 핑계로 책 읽는 양과 상관없이 서점은 자주 드나듦) 물가가 저렴한 종로 인근이 자연스럽게 주요 활동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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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 우리는 만나는 장소뿐 아니라 먹는 음식도 매번 비슷하다. 여자 셋이서 피자, 파스타 집은 검색조차 해보지 않는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겨울엔 굴보쌈 아니면 과메기다. 이날은 굴보쌈을 먹기로 하고 만났는데, 가게에 들어서니 오늘도 우리가 제일 젊다. 대학 다니던 때야 당연히 그랬지만 이젠 마흔에 가까운 30대인데도 여기에 오면 게 중 젊은 사람 축에 속하게 된다.


"우리도 잠실 같은 데에서 만날까 봐. 롯데타워."

"근데 거기서 만나면 어디가? 아는 데가 없는데."


굴보쌈 중짜냐 대짜냐, 소주냐 청하냐를 가지고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머리를 질끈 묶은 종업원 분이 우리에게 주문하겠냐고 물었다. 우리 또래의 동남아시아계 여자분이었다. 친구가 주문에 착오가 생길까 싶어 입모양에 주의해가며 아주 또박또박한 말투로 주문했는데, 종업원은 무척 빠르고 능숙하게 대답했다.


"노로바이러스 때문에 굴을 팔 수가 없어요. 굴을."


우리는 모두 놀랐다. 굴을 먹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 종업원이 한국말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굴을 팔 수가 없다고 말하는데 그 방점이 '수'에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팔'과 '수' 사이의 짧은 공백, 팔 수가 없다고 하며 '수'자를 조금 높은 음정으로 길게 발음하는 것에 감탄했다. 또 탄식하듯 문장 뒤에 '굴을'이라고 덧붙이는 바람에 우리는 쓸 데 없는 배려를 했군, 싶어 아차차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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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커피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는 추위에 종종걸음을 치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근데 아까 보쌈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있잖아. 자기 집에 갈 비행기값 벌려면 얼마나 일해야 할까?"

"최저시급 안 주겠지? 솥에 데고 다쳐도 치료비 안 주는 거 아냐?"

"그 사람들 자기 나라 가면 다 우리보다 부자야. 우리 걱정이나 해."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는 그랬던 것처럼 내내 이야기를 했다. 아이 키우는데 드는 얘기, 돈벌이가 시원찮아 자존심이 상한다는 얘기, 아파도 돈이 드니까 아픈 게 손해라는 그런 이야기를 줄곧 했다. 헤어지면서는 다음번에도 종로에서 만날 것을 기약했다. 종로3가역 1번 출구에 있는 약국에 가면 영양제를 싸게 살 수 있다, 혈액순환과 콜레스테롤이 문제다, 그런 이야기와 함께.


"그럼 우리 다음에도 종로에서 만나는 거야?"

"응. 우리가 여기 말고 다른 데서 만나본 적이 없어."


이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집에 가는 전철 안에서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이번 겨울 끝나기 전에 만나서 과메기 먹자고, 영양제 살 거면 최저가 검색하고 장바구니 챙겨서 만나자고. 친구들은 오케이, 따봉 같은 이모티콘을 보냈다. 


어쩜 우린 크게 고꾸라진 사람도 없지만 눈에 띄게 대성한 사람도 없을까. 결혼도 출산도 다 비슷한 시기에 해서 늘 고만고만하게 사는 걸까. 나이는 먹었지만 지금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친구들. 내 걱정, 남 걱정은 하지만 세상 원망하는 마음도, 화도 없는 내 친구들. 그리고 그 중 하나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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