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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Jul 27. 2024

식물의 목적

어떤 목적을 유기체 자체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목적은 의식(이것은 선험적 통각의 작용을 의미한다)을 전제하는데, 동물과 식물은 그런 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일리옌코프, 142)     


인간과 그 특유의 유기적 조직은 논리적으로 볼 때 생명체의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우리는 선험적 의미에서 목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의 이성에서(특히 그 선험적 구조에 의해서) ‘목적의 형태로’ 재생산되는 객관적 특성을 자연 자체에 돌릴 수 있는 근거와 권리를 갖고 있다.(일리옌코프, 143)     




18-19세기를 살았던 셸링(1775-1854)을 통해 20세기를 살았던 일리옌코프가 쓴 문장들이다. 다른 무엇보다, 동물과 식물에게는 인간의 목적의식이 없다는 것, 그런 ‘의식’ 때문인지 인간이 생명체의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다는 주장이 눈길을 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연상시키는 ‘인간이 생명체의 정점’에 있다는 일리옌코프의 말의 의미를 묻게 된다. 그동안 인간이 보여 온 인간 및 여타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 파괴의 역사도 인간이 ‘정점’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다른 생명체(동식물)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라고 한다면,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야 할 한낱 생명체일 뿐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목적의식’이 야기한 자연 파괴의 측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묻게 되기도 한다.      


인간을 다른 생명체(동식물)와 구분할 때 그 기준으로 제시되곤 하는 것이 ‘목적의식’이다. 거미도 인간처럼 집을 짓는 뛰어난 건축가이지만 동물적인 본능에 따른 단순 반복 행위이기 때문에, 사전 계획이나 사후 반성이 없기 때문에, 발전이 없다고 주장되곤 한다.      


거미가 집을 짓는 이유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우선’은 자체 보존(보호)이 목적일 것이다. 거미의 목적이 자체 보존을 위한 것일 뿐 거기에 인간들이 주장하는 ‘진화’에 따른 ‘발전’이나 ‘진보’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기준에서라면 그럴 것이다.      



   

맑스는 인간의 ‘노동’을 ‘물질대사’라는 말로 대신한다. “노동은 우선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즉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제어하는 한 과정이다.”(칼 맑스, 237)     


맑스는 자연과의 물질대사는 인간의 생활에서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라고 말한다(칼 맑스, 246). 즉,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우리는 결코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떠나서 살 수 없으며, 그러한 한에서 노동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사이토 고헤이, 22)     


‘물질대사’로서의 인간의 ‘노동’이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라는 칼 맑스의 말에서, ‘물질대사’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 다시 말해, 자연도, 인간도, 물질대사도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하나이면서 전체’인 ‘관계’로 존재한다고 이해한다.   

  

또한, 인간의 목적 의식적 행위에 따른 과학 기술의 발달과 ‘물질대사’의 과정에서 자연 및 인간의 파괴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이해한다. 그러니까, 거미도 인간도 그들의 자체 보존 혹은 그 이상의 진보를 위한 노동이 파괴적이지 않아도 된다고 이해한다.      

  



한편으로, [식물의 사유]의 저자들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자연의 ‘발전’이나 ‘진보’의 의미를 묻게 된다.

      

나는 혼자서 다른 생명 존재들을 존중할 때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질서에 조정 당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회 안에서 공존에 필수적인 규칙들을 존중하려고 노력했지만, 나 자신의 주체성을 억누르지 않는 구조로서 그 규칙들을 존중하였습니다. 나의 욕망은 살고 생명의 문화를 가꾸는 것이었습니다.(식물의 사유, 73-74)    

 

[식물의 사유]의 저자들이 말하는 “나의 욕망은 살고 생명의 문화를 가꾸는 것”은 칼 맑스가 말하는 ‘물질대사로서의 노동’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의 파괴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목적의식’이 인간의 ‘진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2024. 7. 27.            

   


[인용 출처]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예발트 일리옌코프 지음, 우기동/이병수 역, 책갈피 2019

-자본론 1권 / 칼 맑스 지음,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arte 2024

-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 뤼스 이리가레, 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알렙 2020. 원제 : Through Vegetal Being: Two Philosophical Perspec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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