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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즘 Jul 21. 2023

정신장애계 활동을 시작한 이유

그것은 당사자에 대한 애착이었다

  2016년 어느 날, 강박장애가 심해져 찾아간 정신과 의원에서 우울증이라는 말을 들었다. 내게 우울증이란 연예인들이 걸리는 병, TV에 나오는 병이었다. 그런 병이 나에게 찾아왔다니 믿을 수 없었다. 의사는 항우울제를 처방해 주며 심리검사지를 주었다. 그리고 다음 외래에서 "당신만이 갖고 있는 생각이나, 당신만이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까?"라는 말을 들었다. 나의 길고 긴 정신장애 여정의 시작이었다.


0. 정신장애계 활동을 시작한 이유


  사실 나의 우울증은 어릴 때부터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집단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는데, 3년째인 열 살 때 병이 났다. 컴퓨터와 휴대전화라는 관심분야가 아닌, 삶 그 자체에는 흥미가 없었고, 좋아하는 과목도, 선생님도, 친구도 없었다. 매일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경험했고, 그럴 때마다 스스로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살을 의미한다는 것은 중학생 때 알게 되었다.


  우울증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우울이라고 인지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렀다. 부모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어서, 내가 우울증인지 자폐인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우울은 나를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다행히 우울은 더 약해지지도, 심해지지도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있어주었다. 그래서 자살과 자해를 하지 않고 12년을 버텨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모든 고생이 끝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학생들의 괴롭힘은 졸업과 동시에 끝이 났다. 이제 해방이다. 마침 내가 자란 곳과 다른 도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입학식 날 뒤풀이에서 처음 술을 마셨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친구와 밥을 먹었다. 노래방을 친구들과 가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도 이제 친구가 생겼다.


  친구뿐만 아니라 성적도 끝을 모르고 올랐다. 첫 학기부터 4점대를 찍더니, 2학년 때는 4.4로 수석을, 4.5로 차석을 했다. 나를 따르는 애인도 생겼다. 동기들도 교수님도 나를 따랐다. 이제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잘못으로 연애관계가 꼬이고, 세 차례 실연을 했다. 매일 누워서 우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눈물을 그칠 때에는 재회하는 법만 찾아보았다. 우울이 점점 커져갔지만 그때도 내가 우울증이라는 자각을 못했다. 성적도 떨어졌다. 나는 견디다 못해 찾아간 정신과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약을 먹으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며 매일매일 약을 복용했다. 차도가 보이는 듯했다. 이듬해에 다시 했던 심리검사 결과는 그런 내 기대를 산산이 부쉈다. 검사결과는 엉망이었다. 정신병리적 수치의 대부분이 임상적으로 유의미하게 나왔다. 조현병과 관련된 수치는 최고조를 찍기도 했다.


  나를 믿을 수 없었다. 자신에 대한 불신은 감각의 혼란으로 찾아왔다. 나의 감각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듣는 이 소리가 환청인지 현실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환청이 들린다고 고백하니 리스페리돈을 처방해 주었다. 그 약을 먹고 살이 10킬로그램이 넘게 쪘다.


  약을 꼬박꼬박 먹었지만 나의 우울과 정신병리를 잠재워줄 수는 없었다. 결국 정신과에 자의입원을 하게 되었다. 무려 두 달이었다. 입원기간으로 따지면 상위 30%는 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병동에서 자살시도를 하다 아티반 주사를 맞기도 했고, 다른 환자와 싸우다 간호사실로 도망간 적도 있었다. 열악한 환경만큼이나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그 후 119에 실려가 대학병원에 동의입원을 했고 다시 퇴원했다. 이전의 정신증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내가 누구인지 혼란이 찾아왔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인가? 내가 과연 내가 맞을까? 이것을 털어놓으니 교수가 F21 코드를 내렸다. 조현형 성격장애였다.


  그 진단을 정식으로 받으니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그런 진단을 받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 대해, 진단명에 대해 알고 싶었다. 나오는 건 천편일률적인 의학 정보글 몇 편 뿐이었다.


  절망한 나는 유서라도 올리자는 마음으로 정신의학신문에 사연을 투고했다. 그곳의 정신과 의사는 나에게 "내가 완전히 고쳐졌는지 여부가 삶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현재 망가진 상태에서의 새로운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해주었다.


  '새로운 균형'. 나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트위터에 나의 진단명에 대한 정보계정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정을 만들었다.


  정보계정답지 않게 정보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운영은 쉽지 않았고 나는 조용히 계정을 정리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아주 작은 불씨를 일으켰다.


  그 후 정신질환을 다루는 인터넷 카페 코리안매니아의 스탭에 지원하게 되었다. 당시 카페가 소란스러웠는데, 나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스탭이 되어 게시글을 모니터링하고 갈등을 조정했다. 마침 카페지기님께서 나를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에서 주최한 토론회에 데려가주셨다.


  토론회장은 정신과 의사들과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사법입원을 부르짖었고, 가족들은 자기 자식 강제입원시켜 달라고 읍소했다. 나는 부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마침 그곳에서 당시 주치의를 보게 되었고, 그다음 외래에서 사법입원으로 토론을 했다. 물론 사법입원에 반대하는 쪽은 나였다. 그때부터 활동가로서의 싹수가 보였던 것 같다.


  두 번의 경험 모두 활동가로서 두각을 드러낸 건 아니었지만, 그러한 경험이 내가 정신장애인의 당사자주의를 받아들이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추동한 것은 다름 아닌 같은 당사자에 대한 애착이었다. 나와 같은 진단명을 가진, 정신질환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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