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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해 Aug 19. 2024

격물치지(格物致知)



2024.08.20

격물(格物)과 치지(致知)에 두루 밝은 인물로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젊은 날은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 르네상스를 상징한다. 정조 사후  미완의 개혁으로  , 국운회복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순조 이후 외척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몰락의  수순을 밟은 조선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남도의 강진에서 기나긴 유배생활을 시작한 다산의 인생 후반부도 녹록지 않은 고초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대한민국  공직자의 표상은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대표되는 다산의 저술이다. 시대를 관통하여 애민하고 청렴한 모습은 공복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자세이지만 , 그 때나 지금이나 탐관과 오리는 줄어들 기미가 별반 보이지 않고  형태를 달리하여  공익을 사익화하는 재주는 더욱더 교묘해지는 느낌이랄까?

사물의 궁극적 이치를 꿰는 격물(格物)의 목적이 지식을 넓히는 치지(致知)에 있는지, 지식을 넓히는 목적이 사물을 올바르게 파악하여 널리 실용을 추구함에 있는가는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어쩌면 답을 낼 수 있는 격물(格物)의 영역은 내버려 두고 끝없는 사유와 논쟁을 펼치는 치지(致知)의 끝은 결국 마주 달리는 폭주기관차와 같은 모습의 당쟁만이 남아 격물과 치지의 달인인 다산마저 강진의 변방으로 내쫓는 운명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한 운명 때문에  격물(格物)을 놓고 또 다른 치지(致知)의 세계인   저술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진 결과가 다산의  역작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작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주류세력들에게는  서학쟁이의 오명을 쓴 다산의 사상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그렇게 조선의 국운도 쇠락해 간 것이다.

다산초당의 쪽동백이 잃어버린 추억을 찾아서란 꽃말 대로 다산의 젊은 날의 추억을 찾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다산은 추억이 아닌 격물(格物)로서 치지(致知)하고 싶은 대상이 된 것은 분명한 듯하다.

다산의 인생역정은 조선 후기 영 정조 르네상스 시기의 정점을 찍었던 정조에게 발탁되어 자신의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하다가 순조를 거치면서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자리 잡으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고 형제들이 뿔뿔이 유배길에 올라 흩어지는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조선의 국운도 다산의 인생역정과 마찬가지로 정조 사후 안동김 씨 안동권 씨 풍양조 씨 여흥민 씨로 이어지는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 때문에 밑부터 썩어나가고 세계사적 흐름에 뒤쳐진 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었던 것이다.

쇄국이라는 한계를 가진 미완의 개혁,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도 고종과 민비라는 혼군에 의해 무너지고 조선의 국운은 내리막길을 걸으며 망국을 향해 걸어간 것이다.

처절한 망국의 백성으로 자연과학을 기반으로 한 격물(格物)에 눈 뜨고 과학기술 기반의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을 건국한 지도 79년이 지나면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도로 조선의 치(致知)의 부작용 앞에서 우리는 치지(致知)의 남용을 치죄(治罪) 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히 뒤돌아 볼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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