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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해 Aug 22. 2024

도덕경, 종횡무진 networking



2024.08.23

노자도덕경은 도와 덕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복된 설명처럼 보인다. 워낙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표의문자 한자로 전달된 탓도 있지만 노자 특유의 시니컬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써 내려간 도덕경의 내용은 알 수 없는 암호 같기도 하고 미니멀 라이프의 정수 같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고 하는 도덕경의 첫 문장부터 수많은 해석과 논쟁과 그로 인해 야기되었던 논란은 학자와 정치가 그리고 내노라 하면서 혹세무민 하는 사이비 교주부터 속세를 떠나 궁극의 도를 찾아 헤매던 수많은 구도자까지 도대체 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처럼 다가왔다.

한 때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도를 아십니까?로 시작된 특강에서도 늘 도덕경은 단골교재로 등장했지만  도덕경 1장 첫 문장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만 큼지막하게 써놓고 갖가지 해석과 논란만 남긴 체 용두사미로 끝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쩠던 다른 한문 경전에 비해 간략한 부피만 보고 만만하게 보여 겁 없이 달려들었다가 된통 당하기도 하고 무작정 외우고 통달하려는 공부법으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갈 수 없는 도덕경이라는 경전은 글로 쓰였으되 글로 이해하기 어려운 지식의 틀, 고정관념의 틀을 깨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희한한 경전이기도 하다.

왜 노자는 도덕경의 첫 문장을 도가도 비상도라고 이야기 하고  댓 구로 바로 명가명 비상명이라 말했을까? 우선 도를 알아야  명을 알고 명을 알아야 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짐작해 본다.

道라는 글자를 파자하면 책받침 또는 쉬엄쉬엄 갈 착 변에  머리 수가 결합된 회의문자(會意文字)다. 쉬엄쉬엄 가는 것이 무엇이고 머리가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아니면 머리가 쉬엄쉬엄 가는 모습이 무엇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편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리가 쉬엄쉬엄 가는 길 중에 머리, 즉 으뜸인 길이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보자.

길은 골목길이던 신작로던 국도던 고속도로던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와 저기뿐만 아니라 이승과 저승 이생과 저 생을 이어주는 생명줄도 유구한 길이요, 어쩌면 이 생명줄이 우리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도의 참모습은 아닌지 짐작해 본다.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를 대자면 우리라는 대를 이어 내려가는 생명이 쭉 쉬엄쉬엄 걸어왔던 길(道), 즉 생명줄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증거가 바로 우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유행가 가사에서 흔히 듣는 쉬엄쉬엄 가는 인생길이라는 의미가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도의 실체는 아닐까? 의문해 본다.

名을 파자하면 저녁 석에 입 구다. 이름이라는 의미에 왜 저녁이 나오고 입이 나올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생명이 지는 저녁 무렵 죽음의 입구에서 사람은 비로소 이름이라는 것을 생명줄에 남길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인지 당최 헷갈린다.

그러면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에서 겨우 도와 명의 개념 정도를 나름 정리한 것인가? 정리한 바 대로 해석해 보면 생명이 가는 길은 비상한 길이요 생명줄에 남길 수 있을 만한 이름은 비상한 이름이다. 역시 써 놓고도  알쏭달쏭하다.

이제 덕자이다. 德자는 彳(조금 걸을 척) 자와 直(곧을 직) 자, 心(마음 심) 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금문에 나온 德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도를 구성하는 쉬엄쉬엄 걸어가는 길이 유구한 생명줄이라면 덕을 의미하는 조금 걷는 길은 우리가 사는 한 생이라 보면 되겠다. 한 생을 살면서 바른 마음(直心)을 가지고 한 생을 사는 도반들에게 손하나 어깨 한내어 주는 바른 마음이 유구한 생명줄에 아마존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생명줄이 이어지는 가 끊어지는 가를 결정짓는다면 우리는 한시도 덕을 쌓는데 게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 제60장 마지막 구절 덕교귀(德交歸)’의 해석이 여전히 머릿속에 뱅뱅 돈다는 글벗에게 나름의 대답을 하려고 이만큼 돌아왔다. 그러면 덕德은 알았으니 교交를 알고 귀歸를 알면 해석이 되지 않을까?
 
교交는 주고받는 것이다.  귀歸는 돌아갈 귀다. 그러면  덕교귀(德交歸)는 유구한 생명줄인 도를 살고 영원한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우리 개별생명의 일생, 한생 한생 안에서 바른 마음(直心)을 가지고 한 생을 사는 도반들에게 손하나 어깨 한내어 주는 직심直心이 모여 덕이 되고 덕을 주고받는 교交를 통해 덕사로 돌아가는 귀歸가 되어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을 이룰 수 있다는 노자의 가르침의 행동 강령이 덕교귀(德交歸)가 아닐까 사유해 본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는 첫 문장에서 출발해, 도(道)와 명(名), 그리고 덕(德)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해 보았다. 도(道)를 생명의 길로, 명(名)을 죽음의 순간 남기는 이름으로, 덕(德)을 바른 마음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도(道) : 길이나 생명줄처럼 우리를 이어주는 어떤 궁극적인 것. 쉬엄쉬엄 걸어가며 이어지는 삶의 길을 의미.
2. 명(名): 생명이 끝날 때 남기는 이름. 이것은 비상한 것이며, 단순한 이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
3. 덕(德):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한 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 이는 우리의 생명줄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함.

결국,  노자의 "도덕경"에서 언급되는 도, 명, 덕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면서 덕을 쌓고 서로 주고받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도의 실체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내가 내린 도가도 비상도는 도를 도라고 부르려면 세상의 시류와 일상에서 벗어난 비상함을 추구해야만 영원한 생명줄, 도를 이을 수 있으며 이름을 이름이라 부르려면 세상의 공명과 허명에서 벗어난 비상함을 이루어야 비로소 이름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모든 것은 덕교귀(德交歸)라고 하는 행동철학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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