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해 록] 나이가 나이브(naive) 하지 못하구나
세상에는 인간과 재물이 있다.
인간에게는 나이가 있고 재물에는 연식이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에서 사로 달려가는 인간이나 연식이 지나면 고물 취급받는 재물 모두 나이와 연식에 민감하다.
세상이 만들어낸 인간도 인간이 만든 재물도 세월이 지나가면 늙어가고 낡아가기 마련이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힘은 소년을 노인으로 신품을 고물로 바꾸어 놓듯이 세월이 가면 물건도 연식이 증가하며 고물이 되고 세상 속의 인간도 나이를 먹으면서
노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야생에서 빠져나와 문명 세상을 경험하는 동물들에게 나타나는 뚜렷한 현상 중에 하나가 유형성숙(幼形成熟, neoteny) 또는 유태성숙이라고 부르는 진화생물 학자들이 밝혀낸 용어이다.
유형성숙(幼形成熟, neoteny)은 동물이 어렸을 때의 모습으로 성적으로 성숙하여 짝짓기가 가능한 성체가 되는 것을 말하고, 인간과 친화적인 여우만을 계속 교배했더니 이 여우들은 꼬리가 말리고 귀가 달라지며 어른이 되었을 때도 마치 어린이처럼 행동하는 유형성숙 특징이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비단
여우뿐만 아니라 문명세상에 들어온 개, 쥐들이 유형성숙을 하는 대표적 동물이다.
특히 이성으로부터 성선택 압박을 받고 있는 우리 인간도
유형성숙(幼形成熟, neoteny)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은 성체를 지나 노화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나이는 묻지 마세요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필사적으로 화장을 하고 분장을 하면서 나이를 위장하는데 환장을 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한 세대 만에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평균수명을 극적으로 늘려온 21세기를 사는 대한민국에서 나이는 이제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유행하더니 이제는 기대수명 100세를 살고 있는 지금 자신의 나이가 성에 안 차 60여 년 전인 <1962년 평균수명 55세> 0.55 ×자신의 나이를 현재 나이로 삼자니 너무 나간 것 같다며 양심까지 챙기면서 한 세대 전인 1992년을 기준으로 하여(<1992년 평균수명 72세> 0.72 ×자신의 나이를 컴퓨터처럼 만들어 내면서 그래도 좀 민망은 하지만 나름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합리적 나이라고 우기며 웃는 나이브(naive)한 미소가 어째 나이브(naive) 하지 못하구나
나잇값을 못한다는 말이 있다. 나잇대마다 가치가 매겨져 있고 그 나이에 걸맞게 생략되지 않은 인생의 경험이 쌓였을 때 우리는 지구라는 공간에서 흐르는 시간을 타고 여행하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각문명을 살고 있기에 청춘의 봄이 무조건 아름답고 보기 좋다고 젊음을 흉내 내지만 인생을 잘 사는 방법 중 하나가 때를 알고 느끼는 일이다. 원숙한 노년에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무리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것은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는 이치와 닮아 있다.
우리의 인생도 늙음을 두려움으로 인식하고 가래로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고 봄의 찬란함 못지않게 가을의 원숙함도 반드시 겪어야 하는 소중한 경험이며 마치 만추의 가을에 감나무에 매달린 잘 익은 홍시가 제 무게를 못 이겨 그대로 감꼭지에서 꼭하고 떨어지듯이 살면서 사라지는 인생의 겨울은 또 어떨지 나이를 나이브하게 한번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