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怨讐는 원수를 낳고 또 복수復讐는 복수를 낳는다. 원수怨讐의 의미는 원한怨恨이 맺힐 정도程度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을 가리킨다. 원수怨讐는 정도程度도 다양하다. 하늘에 사무치도록 한이 맺히게 한 원수를 가리키는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로부터 하늘을 함께 이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 세상世上에서 같이 살 수 없을 만큼 큰 원한怨恨을 가지는 대천지원수戴天之怨讐를 거쳐 삼생三生에 끊어지지 않는 가장 깊이 뼈에 사무치는 원수怨讐 삼생원수三生怨讐까지 용서받기는 어려워도 원수 만들기는 업을 쌓는 인간들의 다반사이자 일상사인지도 모를 일이다.
망국과 독립전쟁, 광복과 해방공간을 통 털어도 아니 한국사 전시대를 둘러봐도 동족상잔의 6.25 전쟁만큼 우리 민족끼리 전 국토에 걸쳐 광범위하게 많은 국민들이 서로 죽고 죽인 동족상잔의 역사는 없었다.
군인과 군인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죽고 죽인 것도 모자라 인공치하 북한군 점령지에서 자행된 인민재판의 이름으로 처형되고 학살된 민간인들, 국군과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즉결처분되고 노동자 농민이 아니고 자본가와 지주들은 그들 밑에서 불만을 키워왔던 완장찬 이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고 생명을 위협받는 처지로 내몰렸다.
1908년 1월생이 겪은 망국이 몰고 온 거악의 일제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말기에도 여전히 살아있던 질서가 역설적이게도 광복의 그날부터 해방공간 내내 분열과 혼란의 씨앗이 우리 민족에게 파종되고 1950년 6.25 전쟁 3일 만에 함락된 수도 서울에서 고스란히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150만 서울시민들이 감당해야만 했던 인공치하 3개월 간의 혼란과 무질서가 자양분이 되어 국민들의 정신과 육체에 가해졌던 야만은 이후 전쟁의 포화가 그친 뒤에도 두고두고 동족끼리 원수怨讐를 지고 복수復讐가 복수를 낳는 민족사 최대 비극, 사분오열이 잉태되어 자라나고 있었다.
6.25가 일어나자 토굴 속으로 들어가 생사가 오락가락했던 1908년 1월생의 뇌리에 떠오른 25살 꽃다운 나이로 순국한 1908년 6월생 매헌이 그토록 원했던 광복된 조국의 모습이 서로 죽고 죽이고 원수를 만들며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처참한 현실인가, 악몽이라면 깨어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1950년 6월 27일 미아리고개를 넘어 탱크를 앞세우고 들어왔던 북한군이 석 달 만에 1950년 9월 28일 퇴각할 때 미아리 고개는 탱크 대신 철사줄로 꽁꽁 묶인 8만 7천 명의 납북인사들로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되고 말았고 그 납북 행렬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1908년 1월생에게는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9.28 서울 수복으로 국군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대한민국 정부는 군경과 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북한군에게 처참히 학살된 그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눈이 뒤집혀 버렸고 순식간에 서울 수복이 복수로 바뀌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복수로 이글거리는 자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은 희생양을 만드는 것이었고 납북에서 탈출했다고 해서 면죄부가 주어지기에는 그들의 원한과 복수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죽지 못한 것이 죄라면 인공치하 3개월 기간 동안 살아남은 서울시민들은 죄다 죄인일 수밖에 없다. 6.25가 일어나자 경황 중에 잽싸게 피난 가서 살아 돌아온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자책해야 할 몫까지 더해 인공치하 석 달을 살아내고 기아선상에서 돌아온 서울에서 생존한 자들에게 원수를 갚는 복수 앞에서 옥석을 가리기에는 가족을 잃은 그들의 분노가 눈을 가리고 앞을 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