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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해 록] 백년전쟁 18, 수복修復1950

by 윤해



나와 너, 나라와 국가 같이 다르면서 같고 비슷하면서도 반대인 개념하에 우리는 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일상의 전쟁이 평화라고 한다면 비상시에 드문드문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평화가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햇깔린다. 한반도 백년전쟁 중에서도 동족상잔의 광란에 휩쓸린 1950년을 살았던 1908년 1월생에게 있어 인공치하 3개월은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였다.

서로가 서로를 밀고하고 비판하며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적으로 둔갑되고 순간의 판단이 생사와 직결되었던 점령지 서울에서의 생사의 갈림길은 탄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최전선뿐만 아니라 인공치하 후방에서도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귀를 때리는 포탄과 총소리가 서서히 가까워 오고 서울을 지키는 북한군들이 분주하게 서울 중앙청앞 세종로에서 마포까지 촘촘히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때 인공치하에서 이념의 조국 북한을 위해 반동분자들의 색출과 학살에 가담했던 부역자뿐만 아니라 죽지 못해 강압에 못 이겨 인공에 발을 담근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에게도 유엔군과 국군의 서울 수복修復작전에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미국이라는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원수가 최초로 결성된 유엔군을 이끌고 남해를 거쳐 제주도를 경유하여 서해를 건넌 사건은 세계사에서 시저가 루비콘강을 건너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로 로마에 군대를 이끌고 입성한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장대한 스케일의 군사작전이 현대판 시저 맥아더가 결행한 인천상륙작전 OPERATION CHROMITE이었다.

OPERATION CHROMITE가 교두보가 되어 크롬을 첨가한 유엔군 강철부대가 모루가 되고, 낙동강 전선을 돌파한 미 8군 워커장군의 부대에 크롬을 부어 넣어 만든 강철망치로 적을 모루 위에다 올려놓고 망치로 쳐서 북한군을 납작하게 뭉개고 수도 서울을 되찾겠다는 현대판 시저 맥아더의 서울수복작전, 망치와 모루 hammer and anvil작전은 한 치의 빈 틈도 없이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크로마이트 작전의 지휘권을 미 제10군단 알몬드에게 넘긴 맥아더는 정예 미 제1해병연대와 함께 직접 서울 남쪽을 방어하는 북한군을 격파하면서 서울수복修復에 한 발자국 씩 다가갔고 알몬드는 개전 3개월째가 되는 9월 25일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크로마이트 작전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북한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실제로 9월 27일 오전 6시 국군과 유엔군 선발대가 서울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인공기를 내리고 석 달만에 태극기를 게양하였지만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완전히 서울을 수복한 때는 1950년 9월 28일이었다. 서울 교외에서는 확보한 서울을 방어하고 서울 인근의 적을 탐색하는 작업이 10월 초까지 이어졌고, 10월 2일부터 3일까지 의정부 일대에서는 북한군과 미군 간에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울이 완전히 수복修復된 이후 9월 29일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로 돌아왔다. 한편 낙동강 방어선에서도 인천 상륙 작전과 병행해 9월 16일부터 공세를 시작했고 9월 22일 대한민국 국군은 일부 지역에서 방어선을 돌파했다. 공세를 지속한 낙동강 주둔 유엔군은 9월 27일 옥천을 점령한 뒤 대전을 탈환했고, 같은 날 미국 제8군과 미국 제10군단은 공세를 지속해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OPERATION CHROMITE과 연이어 진행된 망치와 모루 hammer and anvil작전은 현대판 시저 맥아더라는 영웅을 탄생시키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서울 수복修復 및 기타 지역에서의 공세가 완료된 이후 1950년 10월부터 패주 하는 북한군을 추격하며 국군과 유엔군은 감격적인 38선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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