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 당시 참전한 미군 장병들이 바라본 한국군의 모습은 어떻게 보였을까?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그로 인한 관점이 다르겠지만 전투 스타일을 한마디로 모아보면 '패주敗走와 진격進擊 모두 빠르다'라는 말로 압축된다.
그 나라의 국민성은 과연 무엇이 결정하는가? 이모저모 생각해 봐도 국민성을 결정하는 제1요소는 국민이 살고 있는 주변 환경적 요소일 것이다. 즉 대륙이 다르고 반도와 섬이 다르며 산과 들 그리고 바다와 강에 따라 국민성이 달라진다. 우리는 한반도 안에서 이웃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수천 년을 살아온 민족이다. 나와 너 사이에서도 최소한의 물리적 거리, 도주거리가 존재하듯이 국가와 국가 간의 경계, 국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며 이러한 지정학적 요소에 따라 국가의 명멸과 흥망성쇠가 좌우되며 그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독특한 국민성이 길러지고 강화되기 마련이다.
비록 38선이 거악의 일제를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임시로 그은 지리상 스케일이었다 할지라도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의 힘의 균형점이 모이고 모여 선이 되고 그 선이 남북의 분단선이 된 지도 5년이 지나고 한반도에 살고 있었던 우리 모두는 망국과 독립전쟁을 거쳐 광복과 건국의 해방공간에서 38선은 반드시 지워져야 한다는 민족적 염원만큼은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품고 있었을 것이다.
6.25 개전과 북한군의 남침으로 준비와 기세에서 모두 꺾인 국군은 런승만이라는 적들이 붙여준 별명처럼 불과 개전 한 달 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고 부산으로 대한민국 임시 수도가 바람의 속도로 이전해 갔다.
크로마이트 CHROMITE, 해머와 엔빌 hammer and anvil작전으로 서울 수복을 하였고 이제 패주 하는 북한군을 뒤쫓는 일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던 1950년도 가을의 전황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질서가 뒤섞여 돌아가면서 38선을 돌파하는 문제로 요동치고 있었다.
선빵으로 기세가 오른 적을 저력의 카운터 블로를 작열하면서 꺾는 순간 전세는 삽시간에 바뀌고 적은 지리멸렬 와해되고 와해된 적을 격파하는 것보다 더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일은 아마 드물 것이다. 1950년 가을의 유엔군과 한국군의 상태가 딱 이랬을 것이다.
서울수복과 복수가 교차하던 그 시기 1908년 1월생은 다시 한번 살아남아 1908년 6월생 매헌도 상상치 못했고 38선을 베고 죽겠다며 통일된 조국을 위해 일신을 던진 백범도 보지 못한 한민족 통한의 분단선 38선 돌파를 기어이 보게 되었다.
1950년 10월 1일 강원도 양양에서 국군 3사단 23 연대 3대대가 최초로 38선을 돌파한다. 이는 38선 이북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실시해도 된다는 맥아더 장군으로부터의 명령이 내려가기 일주일 전 상황이었으며 급격하게 무너진 북한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38선 돌파는 한국군에 의해 동부전선에서 시작되었다.
양양 주문진 속초를 거쳐 고성 간성 해금강을 너머 패주하는 북한군을 쫓아 원산의 명사십리 백사장까지 한반도 최고의 절경 동해바다를 끼고 내달렸을 동부전선 국군의 발걸음은 1950년 10월 1일, 누가 한국군은 후퇴도 빠르고 진격도 빠르다고 아무리 비아냥거려도 마냥 가볍고 희망차며 민족적 숙원, 통일을 이루는 장도의 첫걸음이자 역사를 다시 쓴다는 희망으로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군기가 땅에 가득 찬 그날만큼은 진정 국군에 의한 국군을 위한 국군의 날 10월 1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