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월 20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소련과 더불어 동서 냉전의 양대 패권국으로서 세계패권질서를 구축하고 있었고 1월 29일 주한미군은 핵무기도입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그해 7월 1일 유엔군사령부가 도쿄에서 서울로 이전하였고 1956년 10월에 설립한 국제원자력기구 IAEA 헌장이 7월 29일 발효되었다.
이로써 리틀보이와 팻맨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이후 가공할 만한 핵폭탄의 위력을 목격한 세계는 핵폭탄으로 공멸할 수 있다는 핵공포 속에서 세계패권질서는 패권국 간의 핵균형과 핵확산 금지라는 두 가지 원칙과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인류의 전쟁사는 어쩌면 핵 이전과 핵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핵폭탄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언급이 불가피할 정도로 절대적이다. 핵, 핵이라고 말은 많지만 핵폭탄을 직접 맞아본 민족은 일본민족뿐만 아니라 2차 대전 말기 유난히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우리 민족을 강제로 징용하여 히로시마 나가사키 군수공장으로 끌고 간 일제로 인하여 우리 민족의 억울한 원폭피해도 만만치 않다.
이처럼 절대반지이자 절대무기로서 핵은 2차 세계대전 이후 3차 세계대전의 순간순간마다 인류전체의 공멸을 상기시켜 자제하고 삼가는 무시무시한 핵균형의 살얼음판으로써 세계패권질서를 견인했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국지전을 제외하고 강대국 간의 대결은 늘 벼랑 끝 대치 전의 결과는 결국 협상이었다.
핵을 맞아 본 민족으로서 핵에 대한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오늘날 한반도의 비핵화는 결국 체제 싸움에서 완벽하게 패한 북쪽의 독재자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절대 반지인 핵무기를 남쪽 매국세력의 도움을 받아 완성하고 이제 핵탄두를 ICBM에 실어 공격할 전달체계 시험마저도 완성되는 단계에 와 있다. 결국 한반도 비핵화는 남쪽 만의 비핵화로 결론이 났다. 비대칭 전력인 핵을 완성한 북한은 이제 수시로 우리를 위협하고 모욕하며 능멸해도 그에 대응하는 무기는 우리 손에 없다. 결국 핵이라는 절대반지는 6.25 전쟁의 전범이자 3대 세습이라는 도로조선의 유령에게 끼워져 있는 기막힌 현실 앞에서 햇볕정책이라는 미명하에 북핵완성에 기여한 매국부역세력들은 과거를 반성하기는커녕 뻔뻔하고 가열차게 또 다른 비대칭 전력, 사이버전을 가동하여 오늘도 여념 없이 선전선동과 내란으로 피땀으로 건설한 대한민국을 뿌리째 흔들려고 온갖 생쇼와 억지로 기만하고 공작하면서 도로조선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1908년 1월생은 6.25 전쟁 인공치하 서울에서 신촌의 토굴 속에 은거하다가 1.4 후퇴로 피난 하면서 떠난 연희대학교가 1957년 1월 5일 세브란스 의대와 통합하여 연세대학교가 되었다는 소식에 만감이 교차하면서 나라의 동량을 길러내어 초토화된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해 하방 하여 낮은 자리에서 자강 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또 다른 전쟁이 그 앞에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1월에 발표한 주한미군의 핵무장은 7월 15일 본격적인 착수에 들어갔고 10월 4일 소련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다. 우주 시대의 개막을 알린 사건이었다.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2월에 제11차 최고국무회의 확대회의에서 "인민 내부의 비 대항적 모순"에 대해서 건설적 비판에 대해 긍정하였으나 6월 9일 예상보다 너무 많은 비판에 격노한 마오쩌둥은 반동에 대한 척결을 교시하면서 대대적 피바람을 예고했다.
핵공포가 가져온 역설적 평화가 1957년을 가로지르면서 국제사회는 핵이라는 절대반지를 누구나 끼울 수 없다는 강대국 중심의 핵 독점과 핵 확산 금지를 통해 핵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장밋빛 희망으로 1957년은 숨 가쁘게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