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시대 임금의 어좌 뒤에 세워진 병풍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까?
- 답은 ‘일월오봉도’.
말 그대로 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그림으로 사극을 즐겨 보거나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상징적인 그림이다. 그렇다면 독서를 사랑했던 정조의 어좌 뒤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까? 그 답은 바로 ’책가도‘이다.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립하고 자신만의 독서법을 가지고 있었던 정조답게 그의 곁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가 아닌 책과 독서에 필요한 기물들이 주인공인 책가도가 세워져 있었다.
책 읽기에도 도구가 필요할까? 책을 읽는 행위에는 텍스트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각, 청각, 촉각 등의 도구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들은 그야말로 건실하고 청렴한 독서가이거나 진정한 의미의 독서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세속적인 취미인들이라면 그것이 고가의 낚싯대이든 골프채이든 간에 자신만이 애용하는 도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독서가들에게도 개인적인 독서 습관이나 방법에 따라 저마다의 애정 어린 도구들이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평범한 우리는 정조와 같이 팬시하고 부유하며 독창적인 예술적인 감각은 지니지 못했지만 책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그에 못지않다. 오늘은 욕심만은 정조에 못지않은 평범한 독서가가 애용하는 책 읽기의 도구를 소개하려 한다.
알라딘 sticky bookmark, 120매, 2,800원
문구점은 독서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노트와 펜, 연필은 책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 그들은 늘 우리 소비의 사정거리 내에 있다. 다양한 문구류 중에서도 독서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문구류가 있다면 그것은 테이프형 북마크이다. 북마크는 책에서 좋아하는 구절이 나왔을 때나 작가의 의견이 나와 달라 한 번쯤 고민해 보아야 할 지점이 있을 때, 혹은 지나칠 수 없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문장을 마주쳤을 때 소중히 간직하는 책의 귀퉁이에 살짝 붙여 마킹해 두는 물건이다. 문제는 제품의 특성상 접착되지 않은 부분이 책의 바깥으로 돌출되니 만큼 그것이 책의 외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데에 있다. 하나의 예술 분야로까지 취급되며 때로는 심플하게, 때로는 화려한 색감과 질감을 뽐내는 책의 표지 옆으로 색색깔깔의 북마크가 덕지덕지 삐져나온 모습이라니! 제품의 유용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참을 수 없는 외관과의 부조화를 견디지 못했던 나는, 취향에 맞는 북마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기에 이르렀고 다양한 시도 끝에 드디어!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두루 갖춘 북마크를 찾아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판매하는 sticky bookmark는 무채색의 단아한 색감과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맞춤한 듯 아담한 사이즈, 드물게도 곡선을 그리며 뻗어 나온 마킹 부분, 이동성을 고려한 책갈피 기능 등 디자인적인 매력을 차지하고서라도 유용한 면이 한가득인 독서 생활의 필수품이다. 알라딘의 무료 배송 금액인 30,000원을 맞추기 위해 늘 대량 주문하지만 몇 달 새 다 써버리는 이 북마크에 한해서라면 나는 언제까지라도 충성도 높은 고객일 것임에 틀림없다.
겨울서점 hiemes 문진, 29,900원
문진-글을 쓰거나 읽을 때 종이가 안 움직이도록 종이 위에 두는 금속, 돌, 도자기, 뿔이나 뼈, 플라스틱 등으로 만드는 무거운 물건 (나무위키)
문방사우의 친구쯤 되는 위치에 있는 서예의 도구쯤으로 여겨지던 문진이 독서가들의 애장품 리스트에 오른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반구의 형태에서 전통적으로 써 오던 기다란 육면체 모양, 귀여운 동물들의 외양에 이르기까지의 그 다양한 라인업 중에서 독서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문진을 찾아 기꺼이 지갑을 연다.
천태만상의 문진 중에서 내가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은 김겨울 작가가 유튜브 겨울서점 채널에서 한정판으로 판매했던 hiemes 문진이다. 큰 판형의 책들도 거뜬히 지탱할 수 있는 기다랗고 매끈한 스테인리스 바디에 두꺼운 책장도 지탱할 수 있는 270g의 무게감, ‘나는 문진입니다.’라고 적혀 있는 것 같은 전형적인 문진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잃지 않은 세련미! 오픈 날짜를 기다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오픈런을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판매가 시작될 때마다 업무가 겹쳐 구입을 할 수 없었기에 볼 때마다 나를 시름시름 앓게 하는 아이템이다.
Pilot Faxion 지워지는 볼펜
볼펜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문구류이다. 책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기록하기에 집착하는 독서인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펜이나 연필 브랜드를 마음에 하나쯤 지니고 있다. 얇고 뾰족한 펜촉을 지닌 펜에 집착했던 학생이었던 나는 중년이 되면서 굵직하되 투박하지 않은 선을 그을 수 있고 깨끗하게 기록을 지울 수 있는 Pilot사의 볼펜에 빠지게 되었다. 흔히 학교 선생님들의 채점에 이용될 만큼이나 깨끗하게 지워지는 볼펜으로 유명하니만큼 나이를 먹으며 실수를 종종 저지르는 무뎌진 손에 꼭 맞다. 손은 무뎌졌고 시력은 흐릿해졌지만 이 펜과 함께라면 나는 또다시 노트 위에서 춤을 추며 구조화된 필기를 말끔하게 해 내는 학생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미도리 노트 MD paper, A5
펜만큼이나 그 스펙트럼이 무궁무진한 문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노트의 세계일 것이다. 책장의 질감과 감촉에 익숙해져 버린 독서인의 손은 때로 자신만을 위한 종이의 물성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좋은 문장을 수집하는 컬렉션이 되기도 하고, 책을 읽고 채워진 나의 머릿속을 투영하는 작은 비평서가 되기도 한다. 질감과 무게, 색깔마저 모두 다른 노트의 세계에서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의 단짝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미도리 노트, 적당히 두께가 있되 습기를 잘 흡수하지 않아서 쉽게 눅눅해지지 않고 언제나 산뜻하게 머릿속의 생각들을 받아준다. 또한 부드럽되 미끌거리지 않는 종이의 표면은 펜의 움직임에 날개를 달아 생각을 매끄럽게 뻗어 나가게 한다. 별도로 판매하는 표지까지 갖추면 독서의 흔적이 한 권의 완결된 작품이 되곤 하니 이 또한 즐거운 체험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책장과 함께 열린 세계는 근사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줌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다양한 아이템들로 그 모습을 구체화시키곤 한다.
추상적인 책 속의 세상에서
손에 꽉진 도구를 통해
때로 그것들은 구체성을 획득하여
노트 위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세계가 되고,
구조화된 지식의 형상을 가지기도 한다.
나에게 맞춤한 옷을 입은 듯한, 내 손에 익은 도구들로 인해 조금 더 즐거워진 독서의 세계에서 잠시라도 오감이 충족되는 독서를 하며 우리는 잠시라도 스스로가 바라는 내가 될 수 있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