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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수정 Nov 14. 2023

가드니아 3

[단편소설] 2023 아르코 창작기금 선정작

경자는 새삼스레 거실을 둘러보았다. 오랫동안 치우지 않은 거실은 너저분했다. 벽을 등에 지고 놓인 큰 미싱 위로 쌓인 천 더미와 아래로 흩어진 잘린 천 조각이 보였다. 몸집이 큰 공장용 미싱이었다. 아들의 돌 무렵 다니던 공장에서 월급이 몇 달 밀리자 남편이 우겨서 리어카로 실어 온 것이었다. 경자는 그것으로 사글셋방 주인집 여자의 옷가지를 고쳐주고 남편이 가져온 옷도 고쳐주었다. 남편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심 쓰듯 옷가지를 걷어다가 경자에게 던져주곤 했다. 경자는 밤을 새워서라도 남편이 가져온 옷을 깨끗이 수선해놓곤 했다. 


 남편이 살아있던 때 집은 반짝반짝 윤이 났다. 시어머니가 요양원으로 간 후 경자는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집안을 쓸고 닦고 정리하는 데 바쳤다. 밤이면 남편이 팔지 못하고 가져온 과일로 청을 만들었다. 설탕에 절인 과일들이 즙을 토해낸 후 쭈글쭈글해지는 것을 보는 일은 재미있었다. 경자는 결과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그 과정이란 것은 남들에게 비치는 모습을 의미했다. 경자는 누군가가 지켜볼 때 더욱 숙련되고 정돈된 동작으로 모든 일을 해냈다. 그 동작은 과시와도 같이 거침이 없었다. 경자는 일을 다니면서도 남편과 아들의 속옷까지 다리미로 다렸고 이불호청은 사시사철 풀을 먹여 손으로 꿰맸다. 사 먹는 음식을 혐오했으며 자신의 손에 닿은 모든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할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보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노동의 의욕을 확실히 떨어트렸다.


 경자는 이제 종일 미싱과 한 몸처럼 앉아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었다. 덧버선, 소파 커버, 냉장고 손잡이, 밥솥, 전자레인지 덮개 따위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을 계속해 만들었다. 미싱 옆으로 경자가 보낸 시간의 결과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경자는 아무리 미싱을 잘해도 옷 한 벌을 만들어본 적은 없었다. 와이셔츠 소매나 카라, 바지 허리 같은 그저 옷의 어느 한부분만을 미싱으로 박았을 뿐이었다. 공장 사장들은 일에 필요한 기술 외에 다른 것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경자는 자석처럼 미싱 앞에 앉았다. 잘라놓은 누빔천의 테두리에 레이스를 박고 찍찍이를 달았다. 요즘은 팔이 아파서 만들기 쉬운 냉장고 손잡이를 만들었다. 시간을 견디는 데는 미싱질 만한 것이 없었다. 천의 색에 맞춰 실을 골라 끼우고 하루종일 아래 위로 솔기를 박아나가는 일을 하다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람 소리가 듣고 싶을 때는 TV를 켰다. 몇십 개의 채널엔 매일 똑같은 프로그램이 나왔다. 별것도 아닌 음식을 먹으며 세상에서 처음 맛본 음식인 양 비명 같은 감탄사를 질러대는 사람들, 음산한 목소리로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불륜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강조하는 여자, 영혼 없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누더기 같은 천막이 멋지다고 반복하는 바보 같은 남자들. 다 남편이 좋아하던 프로그램들이었다. 

 

경자는 드라마를 좋아했다.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서로 웃고 떠드는 모습은 왠지 기억나지도 않은 과거를 추억하게 했다. 모든 드라마는 젊은이들이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엄마 아빠도 경자가 보기엔 젊은이였다. 경자는 젊은이의 얼굴 위주로 드라마를 보다가 그들에게 벌어지는 황당한 오해와 꼬리를 무는 가당찮은 우연과 행운, 휘몰아치는 감정을 구경했다.

 

 경자는 TV를 껐다. 지금 경자가 보고 싶은 것은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의 소꿉놀이가 아니었다. 

 경자는 가드니아를 생각했다. 치자꽃은 뭐고 가드니아는 뭘까. 경자는 오바로크용 바늘로 드르륵 냉장고 손잡이 가장자리를 박으며 자신만 알 것 같은 단어를 생각했다. 오바로크는 오바로크고 자메스는 자메스고 나나인치는 나나인치다. 대신할 단어가 없다. 그런데 치자꽃은 가드니아다. 그것은 경자가 알 수 없는 세계였다. 경자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알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다시 가슴이 조여들었다. 


 경자는 생각을 쫓으려 다시 TV를 켰다. 원색의 옷을 입은 가수들이 경자의 젊은 시절 유행가를 구성지게 불렀다. 미스터 트롯이 끝난 후 TV에서는 노상 가수들이 나와 흘러간 유행가를 불렀다. 저들은 저 노래가 나왔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뭘 안다고. 경자는 비뚠 마음이 들었다. 경자는 가수들의 얼굴을 보며 저 나이 때 자신이 어떻게 살았나 생각했다. 경자는 열 두 살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울로 올라와 더부살이하다가 주인집 미싱 공장에 들어갔다. 경자는 그때 미싱이 지긋지긋했다. 잠을 쫓기 위해 계피를 씹어가며 밤새도록 버선코를 둥글게 박았다. 졸다가 엄지손톱 위로 바늘이 관통해 콸콸 피가 났는데 주인집 여자는 바늘 상처엔 미싱기름이 즉효라며 경자의 손가락을 잡아 기름에 푹 담근 후 굴러다니는 천을 칭칭 동여매 주었다. 흰 버선에 피가 묻으면 물어내라는 엄포와 함께.


 채널을 돌렸다. 경자 또래의 금테 안경을 쓴 여자가 강연 중이었다. 강연의 제목은 ‘후회 없는 삶과 사랑’이었다. 

 나는 후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순간이 주어지든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운명을 탓하지 마세요. 운명은 감내하고자 마음먹을 때 가장 강력한 나의 편이 됩니다.  

 방청객은 감동적인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경자는 후회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했다. 저니와 내 삶은 어디서부터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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