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말했다. 여름은 추석이 지났어도 존재감을 뽐냈다. 10월을 맞이하자, 아침, 저녁 스산한 바람이 가을을 가리켰다. 10월엔 결혼기념일이 있다. 수술 후 여름휴가를 반납했던 아버지, 곁에서 마음 졸였던 어머니와 함께 덕산 온천에 가기로 했다.
시댁 방문 때 내 눈치를 보던 남편과 난 위치가 바뀌었다. 부모님과 여행하는 남편은 둘만 있을 때와 다른 긴장감이 있었다. 노상 즐겨하던 아재 개그에 힘이 들어가 있다. 평소 말을 하기보단 듣는 편인 남편이, 분위기를 띄우려는 모습에 점수를 주긴 했다.
머리카락이 나고 관절염, 심장병에도 좋다는 덕산 온천. 남편 회사와 계약된 워터파크가 있는 숙소를 예약했다. 덕산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워터파크에 들렸다. 아직 워터파크에 가본 적이 없는 나. 두 시간 남짓 사용할 수 있다는 말에, 다음날 넉넉하게 이용하기로 한다.
오솔길로 산책하러 갔다. 배롱나무, 느티나무, 모과나무, 꼿꼿한 소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의 고향 충청도. 익숙한 엄마는 감흥이 덜했지만, 나는 야트막한 산지와 노랗게 익어가는 논들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백제 고찰의 하나인 예스러운 수덕사에 들렸다. 예당호수 흔들 다리 위에서는 시원한 가을바람을 벗 삼아 반짝이는 호수와 눈맞춤 하기도 했다.
각양각색으로 손 뻗은 나무 모습을 눈에 담으며 아빠와 이야길 나누었다. “저희 벌써 결혼 4주년 기념일이에요.” “엄마와 난 속리산 관광호텔로 신혼여행 왔었지. 그리고 해운대 극동호텔.”
얼마 전 친구들과 속리산 관광호텔에 머무르셨다는 아버지. 난 아빠 엄마의 신혼여행으로 순간 이동했다. 아빠 엄마의 신혼여행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허니문 베이비인 내가 잉태된 비밀의 장소. 우리의 네 번째 결혼기념일에 부모님의 신혼여행에 동행해 볼 수 있었다.
산책로에 밤송이가 몇 개 떨어져 있었다. 이미 사람들이 주워갔는지 알맹이는 없었고, 빈 밤송이들이었다.
몇 개를 주워 숙소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찰나. “여기 노다지야!” 땅이 움푹 패, 인적이 드문 공간에 밤송이가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아버지와 남편은 허리를 굽히고 밥 줍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편은 허리춤 주머니가 터질 것 같이 밤을 넣었고, 아버지는 장바구니 가득 밤을 채웠다.
한낮 가을볕에 이마에 맺힌 땀방울. 입을 활짝 연 밤송이를 보니, 비로소 가을인가 싶었다. 길고 뜨거운 여름을 견딘 튼실한 밤 한 톨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숙소에 돌아와 밤을 쪘다. 남편은 아버지와 티브이로 야구 경기를 관람했다. 4년 전 쭈뼛거리던 남편은 아버지에게 밤동무가 되어 있었다. 4년의 세월은 밤송이처럼, 남편의 마음을 열게 했을까. 야구 젬병인 나 대신 아버지와 팀의 승부를 예측하고, 야구 선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밤처럼 익어가는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