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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봄 Jan 09. 2024

시민과 예술가인가, 시민이자 예술가인가?

토마스만의『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그와 나의 예술관을 점검해보다.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 ~1955 독일.

『토니오 크뢰거는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예술관과 자신의 삶에 대한 고뇌, 정체성이 담긴 자전적 소설로, 한 소년이 방황과 성찰,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또래 친구들을 동경하며 사랑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기질투하며 미워하기도 하고, 딜레당트처럼 예술가의 삶을 쉽게 논하려 하는 사람들의 앞에서는 한없이 냉철해지며 이러한 수많은 상황 속 밀려드는 감정들에 혼란스러워하는 토니오는 그의 삶과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보이는 시민의 삶 사이에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낀다. 책의 초반에서 나타나는 학창 시절의 토니오는 주위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고 주어진 환경에 가장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또래 친구들을 동경하고 사랑한더.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속에서 어딘가 이단자 같게만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에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 이후 떠난 남부에서 연인 리자베타를 만나고, 다시금 고향을 거치는 북부여행을 하며 점차 그는 자신을 혼란 속으로 이끌던 시민적 삶과 예술가의 삶 사이에서 그 둘이 배타적 관계가 아닌, 불가분의 관계임을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토니오의 모습과 변화는 학창 시절 나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려보게 했고, 내가 가진 예술관은 무엇인지 생각하도록 이끌었다.


  어린 마음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활달한 친구들을 마냥 동경하기도 했다는 점에선 공통점을 가졌지만, 나의 학창시절 모습은 한스를 동경하던 토니오의 학창시절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음악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예술적인 기질이 있다거나 내가 예술가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만약 주위 또래 친구들과 다르다고 느껴지는 점이 있다면, 당시 내 생각에 그것은 내가 예술가적 기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또래 친구들에 비해 조금 성장이 더디고, 밈이나 문화 등 유행한다는 최신문물을 발 빠르게 쫓아가기에는 나의 관심과 열정이 다소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예술가로서의 재능과 자질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면서도 미련하게 계속 예술을 추구하고 쫓는다는 나의 생각은 대학 입학 이후에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이던, 미술이던 그 어떤 종류든 ‘예술’이라는 것을 행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던 나는, 깊은 생각에 젖어드는 자기 자신을 미워했던 학창 시절 토니오와 달리 끊임없이 사유하고 때로는 무언가에 깊이 빠져들어 세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예술가적 삶을 동경했고, 오히려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한없이 시민적이고 평범한 듯한 나의 일상들을 부정하고 싶었다. '특이하다'라는 말을, '유별나다'라는 말을 들어도 좋으니 나에게도 예술적인 감각이, 다른 이들과 다른 나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유년 시절의 바람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이 책을 읽으며 또래 친구들과 사뭇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때로는 소외감과 고립감을 느끼는 토니오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에 가끔은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잠시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참으로 부럽다!’, ‘그런 자질을 갖고도 시민의 삶을 동경하다니 배부른 소리다!’ 와 같이 한없이 부럽고 질투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책을 읽어나가며 토니오가 느꼈던 감정과 그가 놓여있는 상황들에 푹 빠져 따라가는 일도 흥미로웠지만, 이처럼 나와 비슷한 듯 대조되는 토니오의 모습들을 발견하며 과거 내가 동경했던 친구들의 마음은 어땠을지 생각해보는 일에도 흥미로움도 느낄 수 있었고, '토니오 크뢰거', 그를 더욱 이해하고 싶어졌던 것 같다. 그에게 가장 공감되었던 장면을 뽑자면, 토니오 크뢰거가 댄스수업 이후 사람들 틈에서 슬쩍 빠져나와 아무것도 내다볼 수 없는 창문 앞에 서서 홀로 생각에 잠기는 부분이었다. 창 밖을 응시하는 척 창 앞에 서 있긴 하지만, 실제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 앞에서 밖의 전경이 아닌, 자기자신을 ,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언젠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감정에 휩쓸려서 이유를 모르는 감정을 진정시키고자 애써 침착한 척 아무것도 없는 벽면을 흥미로운 것이 있는 듯 응시했던 나의 모습과 겹쳐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보이지 않는 창과, 새하얀 벽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앞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려 애썼다.

 

 책 전체에 걸쳐 가장 와닿았던 글은 “행복은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사랑하는 상대에게 아무도 모르게 살그머니 다가갈 수 있는 작은 기회들을 포착하는 것이다.”, “악마적인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그것에 깊이 열중하는 자는 아직 예술가라 할 수 없습니다.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 약간의 우정, 헌신, 친밀감, 그리고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닙니다.” , “민중도서관이라? (중략) 그는 여기가 민중과도, 문학과도 전혀 무관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었는데, 이 세 가지 문장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현재 나의 예술관, 그리고 토니오 그가 가지게 된 예술관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류이던, 문화이던 한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서로가 구성되는 일에 기여하며 상호영향을 미치기에, 예술이던, 타 학문이던 그 어떤 분야도 그것을 행하는 주체인 인간, 그리고 그런 주체를 둘러싼‘사회’와 별개로 다뤄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예술의 경우, 인간의 이성뿐만 아니라 내면에까지 침투해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로서 이렇게 예술 외적인 것들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따라서 나의 예술관이자 예술로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우리의 일상 속 가려지기 쉬운 행복함과 풍요로움을 발견해내자”. 그리고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사랑하자”이다. 앞서 언급한 구절들과 나의 예술관을 통해 위 문장들이 인상 깊었던 이유를 더 자세히 짚어보자면, “행복은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나에게 행복은 그 대상이 사람이던, 영화던, 음악이던 늘 어떤 것에 대해 애정을 품을 때 가장 크게 찾아온다. 그리고 이렇게 찾아온 행복들은 ‘누군가를 위한 예술을 창조해보고 싶다는 싶다.’는 생각이나 ‘좋아하는 영화이니 더욱 깊이 이해하고 싶다.’라는 마음,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만큼 나 또한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등으로 이어져 내가 예술을 하려는 원동력이, 삶을 사랑하는 이유가 되어주고는 한다. 또한 예술에는 그 예술의 행위자와 창작자가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만큼, 악마적인 것을 목표로 삼고 열중하는 자, 생동하는 것과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니라는 토니오의 말에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말처럼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과 친밀함, 우정 등을 사랑할 줄 알아야 반대로 사랑받는 예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단지 내가 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자는 생각에도 더 확신을 실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민중도서관이 된 자신의 본가를 보며 생각하는 토니오의 모습은 점점 새로운 관점으로 향해가는 그의 모습과 생각이 잘 드러나는 문장이라고 생각해 가장 인상 깊었는데, 해당 부분을 통해 어떤 것을 처음부터 ‘관련 없는 것’ 혹은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규정하게 되면 충분히 변화를 꾀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차단하게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경계하게 되었으며, 소중하지만 익숙하거나 평범해 일상 속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항상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감사하는 태도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니오는 리자베타에게 ‘길 잃은 시민’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처리되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지금까지도 그가 자신이 ‘길 잃은 시민’이라는 말을 통해 처리되었다는 것을 당시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건지는 뚜렷하게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나는 책을 덮고 난 후 이 책 속에서 등장한 '처리되었다.'라는 표현을 나에게 긍정적으로 적용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처리되었다고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분명 경험했지만, 말로 뭐라 표현해낼 수 없었던 감정들과 부정하고 싶었던 감정들을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글이라는 실체로 직면하게 되었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정돈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시민으로서의 나의 역할은 무엇이며 예술가로서의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그리고“나는 어떠한 시민이자 예술가가 될 것인가?”『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나니 이것은 내가 앞으로 예술을 하는 한, 끊임없이 스스로 묻고 답하여야 할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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