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부터 새로운 부서로 출근했다. 영종도에 위치한 인천 화물 운송 지점이다. 이태 전 본사 팀장 인선에서 밀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출 갔던 곳이다. 석 달가량 지내면서 수출화물 탑재관리사 업무를 배우면서 일했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지난 12월 한 달은 남은 연차를 사용해 집에서 쉬었다. 그간의 지방 지점장 생활을 떠올려보니 잘한 일과 후회되는 일이 뒤섞여 있다. 첫 번째 잘한 일로 걷기를 시작했다. 부산 동래 온천천을 틈나는 대로 걸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듣기 좋았고 숭어 떼와 청둥오리가 노니는 그림이 보기 좋았다.
두 번째, 글쓰기를 시작했다. 혼자 지내다 보니 시간에 쫓기지 않고 사색할 여유가 생겼다. 고단했지만 행복했던 해외 생활을 반추하며 글을 썼고, 순간순간 올라오는 감정을 놓치지 않고 정리해서 글을 썼다. 마지막으로 최준식, 정현채 교수의 죽음학 강의를 듣게 된 것이다. 늘 궁금했던 사후 세계와 이번 생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설명해 주셨다.
후회되는 일은 두 번째 부임지인 청주에서 생겼다. 협력사 직원들을 진심으로 대했다고 생각했는데 악연으로 남게 되어 마음이 아프다. 웹드라마 '경성크리처'에서 마에다의 대사가 생각난다. '인간은 나빠서 배신하는 것이 아니고 나약해서 배신한다'. 서로를 스쳐가는 인연으로 생각하고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앞으로 근무해야 할 인천 화물 운송 지점은 현장 업무를 한다. 본사 사무직과 지점장 업무를 오랜 시간 해 온 나에겐 큰 도전이다. 다시 실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화물 지점은 수출, 수입, 통과 파트로 나뉘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제일 힘들다는 수출화물파트로 배속되었다. 이른바 사내에서 '화물의 꽃'이라는 화물탑재관리사 업무를 한다.
화물탑재관리사 업무는 매우 전문적이다. 화물을 종류 별로 분류해서 적절한 용기 ( 팔레트 또는 컨테이너 )에 적재하는 일을 관리하고 항공기의 어느 포지션에 그 용기를 탑재할지 결정하는 일을 한다. 시간을 다투는 일이기에 순간 압박감이 상당하다. 더군다나 위험물 탑재 시는 온 신경이 곤두선다.
새로운 업무를 시작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극심한지 그저께 머리카락이 빠지는 흉몽을 꿨다. 아내에게 심경을 토로했더니 차라리 둘이서 함께 가게를 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혹자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하지만 요즘 조금씩 용기가 사라지는 내 모습을 본다. 아내의 그 말 한마디가 참 고맙다.
출근 이틀째 되는 날, 인천 영종도에서 화물직무 교육을 받고 있는데 고향 부산의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상기된 목소리다. 학창 시절 가깝게 지냈던 친구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 친구의 죽음은 처음이다. 순간 슬픔이 몰려왔지만 이내 내가 처한 사정을 설명하고 못 가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마음을 다잡고 교육에 집중했다.
퇴근하는 길에 죽은 친구 생각이 다시 났다. 사후세계에 관한 지식을 동원해 그 친구가 어디쯤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먼 길을 떠난 친구를 잠시 잊고 내가 처한 상황에 몰입했던 내가 혐오스러워졌다. 내가 변한 것일까. 모든 것을 제쳐두고 오직 슬픔에만 집중해야 할 순간에 오히려 덤덤하고 잔잔한 감정에 감싸인 나를 바라보는 것이 더 큰 슬픔이다. 고단한 삶을 살았던 친구가 좋은 곳에서 환생해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죽은 자의 큰 슬픔은 죽음 그 자체보다 잊히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은 이 친구를 잊지 않겠다.
사진 by 해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