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째 인수 합병 문제로 회사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처음 합병 이슈가 나왔을 때는 직원들 대부분이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무급휴가, 반토막난 월급, 예년보다 못한 복지혜택으로 차라리 건실한 회사에 인수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우리 회사를 인수할 회사가 선뜻 나타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모 대기업이 곧 인수할 것처럼 계약서까지 썼다가 끝내 무산되었다. 직원들의 실낱같은 희망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우리와 동종 업계인 경쟁사와의 합병 문제가 아주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다들 지쳐간다.
입사할 당시, 우리 회사는 설립된 지 채 십 년이 되지 않은 젊고 신선한 기업이었다. 대부분의 대학 동기들이 훨씬 큰 경쟁사에 입사 원사를 냈지만 나는 우리 회사를 선택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뚜렷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아마도 운명인 것 같다.
우리는 국내 유일의 독점 기업이었던 경쟁사를 따라잡기 위하여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경쟁사보다 더 친절하게 고객을 대하고,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참신한 아이디어를 늘 고민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들은 눈에 띄는 결과로 서서히 나타났다. 외부 서비스 평가에서 우리 회사의 순위가 경쟁사를 앞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고된 회사 생활이었지만 우리 회사와 함께 커가는 나 자신이 대견했다. 예쁜 아내도 회사에서 만났고 잊지 못할 추억도 많이 만들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가는 것처럼 보였다. 지방 공항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가 시내 지점으로 옮겼을 때 간혹 업계 대학 선배들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말을 들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더 열심히 해서 우리 회사로 들어올 것이지?'
그럴 때마다 살짝 웃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웃기고 있네. 머지않아 우리 회사가 너희보다 훨씬 더 좋아질 거다'
이제 그때를 생각하면 씁쓸한 마음이 든다. 활기가 넘쳐 무엇이든지 해낼 것만 같았는데.
하와이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경쟁사 지점장님을 청주공항에서 만났다. 미국에서는 안티트러스트 문제로 서로 대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지방의 조그만 청주공항에서 재회했다. 고단했던 해외 근무 생활을 얘기하며 서로 공감한다. 우스갯소리로 합병이 되면 같은 회사 직원이 된다는 말도 한다. 운명인가.
그룹 공채로 입사했는데, 연수 성적으로 가고 싶은 계열사에 보내 준다고 해서 연수기간 내내 고3 수험생처럼 공부했다. 결국 내가 원했던 색동날개 회사 배지를 받았다. 그 배지를 받는 순간 다 함께 환호했던 입사 동기들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다.
사진 by 해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