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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맘 Sep 02. 2024

나 홀로 기차여행

새벽에 집을 나섰다.

출근이라는 습관과 헤어진 후 오랜만에 느껴보는 부지런한 외출이었다.

미리 지하철앱을 켜고 출발지와 도착지를 입력하며 최적의 환승기록을 검색했다.

오늘은 특별히 코레일톡에 저장된 왕복 승차권도 잘 있는지 다시 한번 안부를 확인해 보았다.

청량리역에서 태백으로 가는 오전 7시 34분 무궁화호기차 탑승이 새벽길을 재촉하는 이유가 되었다.

집안의 토지 등기상속과 관련해서 단순 법원민원행정 업무처리하러 가는 길이다.



     

우리 모두에게 지독했던 8월의 폭염도 끝나가는 모양새다.

신발을 꺼내 신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던 고온다습한 공기 접촉이 사라졌다.

'입추'에 이어 '처서'라는 절기가 불러온 계절의 방향키는 확연히 바뀌고 있었다.

반팔차림의 내 손에는 혹시 몰라서 챙긴 얇은 바람막이 점퍼까지 들려있다.

조금 오버스럽긴 하지만 냉방기가 작동하는 열차와 이맘때 예상되는 강원도의 서늘한 날씨를 생각해서였다.



     

도착한 청량리역 대합실엔 듬성듬성 빈 의자가 보일 정도로 평일 새벽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든 사람부터 김밥이나 어묵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려사람들로 오가고 있었다.

움직이는 건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여행가방도 메지 않은 비둘기 한 마리는 대합실 안에서 익숙한 듯 짧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탑승 15분 전이다.

전광판에 안내된 8번 승강장을 향해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갔다.

대기 중인 열차 한 대가 보이길래 모바일 승차권에 적힌 열차번호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숫자에 집중했다.

열차외부를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열차번호가 따로 눈에 띄지 않았다.

전동차 내부를 점검 중이던 승무원께 열차번호를 확인하고 서야 가볍게 무궁화호에 올랐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 더 세심하게 챙기게 되는 내가 나를 칭찬했다.

 


   

3호차의  중간정도 위치에서 승차권에 적힌 좌석번호를 찾았다.

통로 측 지정석에 앉으며 열차내부를 쭈욱 한번 둘러보았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열차번호가 연결 출입문 위에 떡 하니 적힌 걸 보고 괜히 한 번 째려보았다.

모퉁이 쪽 작은 LCD 모니터는 코레일의 멋진 홍보영상을 무한 반복재생 하느라 바빠 보였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좌석에 앉자마자 부족한 아침잠을 위해 눈을 감거나 휴대전화와 아이컨택을 했다.

열일하는 LCD 모니터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무심한 승객들이 야속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사라진 통일호와 비둘기호의 역할까지 대신해야 했던 무궁화호는 곳곳에 세월의 피로감이 엿보였다.

교체의 손길이 필요해 보이는 객실 천정의 LED 전등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미비한 시설관리를 보고 비난 섞인 감정이 들기보다는 노후객차라서 이해되는 묘한  납득이 생겼다.

창 측 옆자리에 낯선 남자분이 앉자 잠시 후 열차는 오래된 관절을 움직이듯 출발을 했다.

 


   

정차역이 많은 무궁화호는 일반승객들은 물론이고 통학열차로 이용되어 중고등 학생들이 타기도 했다.

열차가 양동역에 정차했을 때는 등교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내린 걸로 봐서 근처에 역세권학교가 있는 듯했다.

예미역에서는 더 많은 승객들이 내렸다.

어느덧 빈자리가 많아지자 옆자리에 있던 남자승객이 건너편 빈자리로 옮겨 앉아 주어서 내심 고마웠다.

승차권 확인 검열을 받는 불편함조차 감수하는 그분 때문에 나는 빈 옆자리를 양보받았다.

덕분에 옆사람 눈치 없이 준비해 간 샌드위치와 커피맛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옛 기차여행의 대표 간식이었던 삶은 계란과 사이다의 추억을 떠 올려 보기도 했다.

혼자 듣는 맑고 잔잔한 산울림의 노래가 있고 수필집 한 권을 손에 쥐고 있으니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해발고도가 높은 강원도 태백이 가까워질수록 귀속이 막혔다 뚫렸다를 반복하며 터널도 여럿 통과 했다.

일본 쪽으로 북상하는 제10호 태풍 ‘산산’의 영향으로 벌써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고원 청정도시 다운 환영인사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리 준비해 간 바람막이 점퍼도 걸쳤다.

 


    

달리는 열차의 창문밖 빗줄기는 줄눈이 되어 빠르게 뻗어갔다.

초록의 산등성이와 하얀 물안개가 어우러져 신비롭고 촉촉해진 강원도의 산골 풍경도 눈에 들어왔다.

기차 브레이크 소리가 길게 들리더니 태백역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멀리 나란히 보이는 태극기와 코레일 깃발, 그리고 초록색 무재해 깃발이 비바람에 격하게 나를 반겨 주고 있었다.

2028년이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무궁화호 열차는 다음역을 향해 천천히 무거운 몸체를 움직였다.

오래된 몸으로 나를 업고 온 무궁화호를 기억하고 싶어서 휴대전화의 카메라 기능을 켰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장의 사진을 남기며 무궁화호와 둘이서 느꼈던 고마움의 인사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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