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라워수 Aug 01. 2023

[비행일기] 한국 비행 두 번 다신 안 할 거라는 기장

우리를 괴롭히는 그것


몇 달 전 한국에서 유럽 돌아가는 인바운드 비행하는 날, 호텔 로비에서 만난 기장이 날 보더니 다짜고짜 자기는 이제 두 번 다시 한국 비행을 안 할 거란다. 갑자기요..? ​


왜 그러냐니까 자기 시차 때문에 한 시간밖에 못 잤다고, 너는 몇 시간 잤어? 이러길래 ‘세 시간 잤나? 나도 너무 피곤해’ 했다. 키 190은 돼 보이는 덩치도 큰 기장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너는 이 루트 어떻게 자주 해? 나는 못해 두 번 다시 안 해~~ 란다. 그 맘 RGRG..

다른 회사도 비슷할 텐데, 크루들끼리 항상 묻는 질문이 있다. 너 어제 몇 시간 잤어? How many hours did you sleep last night? Were you able to sleep? Wie viele Stunden hast du geschlafen?? Hast du gut geschlafen?? 평소엔 그 누구에게도 묻지도 듣지도 않는 질문이지만 유니폼 입는 순간 hello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이다. 밤 11시에 출발해서 열두 시간 깨어 있어야 하는 비행, 새벽 두 시엔 일어나서 준비해야 하는 아침 여섯 시 첫 비행, 시차 완전히 바뀌는 비행 등등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급인 자다 말고 비행 가야 하는, 바이오리듬과 일상을 무시하고 일해야 하는 환경이라 그렇다.

Traveling east causes more problems than travelling west because the body clock has to be advanced, which is more difficult for the majority of humans than delaying it. Most people have an endogenous circadian rhythm that is longer than 24 hours, so lengthening a day is less troublesome than shortening it. Equally important, the necessary exposure to light to realign the body clock does not tie in with the day/night cycle at the destination. [4]

https://en.wikipedia.org/wiki/Jet_lag


거기다가 동쪽에서 서쪽 가는 것보다 (아시아->유럽), 서쪽에서 동쪽 가는 게 (유럽->아시아) 더 힘들다. 보통 레이오버는 짧게는 12시간에서 길어야 48시간 정도 머물다 가니 시차적응을 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것! 아시아 시간으로 새벽 네시일 때 유럽 시간으로는 저녁 아홉 시 밖에 안 됐는데 아무리 안대를 끼고 반신욕을 하고 그래도 어떤 성인이 밤 아홉 시에 스르르 잠들 수 있나요?? ㅠㅠ 초등학생들도 열한 시에 자지 않나요??  뒤척뒤척하다 잠 좀 드나 싶으면 벌써 방으로 wake up 콜이 울린다. 한 시간은 눈 붙였나 싶은데 출근 준비하래… 일어나… 눈 떠… 오늘 380 만석인데 13시간 비행이야…

소수의 복 받은, 잠 잘 자는 크루들만 빼고는 대부분 좀비처럼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게 된다. 돌아가는 비행 브리핑 할 때 사무장이 보통 ‘다들 잠 못 자서 피곤하지 우리 서로에게 나이스하자’라고 시작할 정도! 다들 브리핑 끝나고 비척비척 갤리로 가서는 커피 머신부터 킨다.

국내나 다른 외항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나는 그나마 정해진 노선들만 몇 년째하고 있어 나한테 맞는 루틴을 찾았는데(찾았었는데 전쟁 때문에 루트 바뀌면서 다 망가짐..), 국내선인데도 시차가 있는 미국이랑 일주일 동안 오대양 육대륙 다 가는 힘들기로 유명한 중동 항공사는 잠 관리를 어떻게 하려나 궁금하다. 제가 해보고 싶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호호

이렇게 9년을 살다 보니 잠에 정말 예민해졌다. 수면안대, 귀마개는 비행 가방마다 넣어놨다. 원래도 잠이 많았고, 자는데 누가 깨우는 거 정말 싫어했는데 지금은 화가 날 지경. 특히 잠든 게 레이오버 동안 유일하게 안 깨고 푹 잘 수 있는 시간인데 남의 발소리 알람소리 옆방소리 등등에 깬다면 정말 돌아버려… 진짜 화나… 심지어 픽업 전날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출근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더 잠이 안 온다. 졸린데 버티고 버티다 새벽 한시쯤 누우면서 “제발 눈 떴을 때 여섯 시만 돼도 좋겠다” 하고 기절한 후 눈 떴는데 겨우 새벽 세시일 때의 좌절감! 오늘도 망했네 싶은 마음! 바이오리듬 참 신기한 게 시차 적응 못하고 잘 때는 아무리 피곤해도 4시간 지나면 눈이 반짝 떠지고 다시 잠이 안 오거든요! ㅠ​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매년 해야 하는 정기교육에서도 잠에 대해 꼭 짚고 넘어간다. 왜 중요한지 어떻게 해야 수면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등등. 교육 좋지 좋은데 내가 잠자는 거 중요한 거 몰라서 안 자고 못 자는 게 아니라고~

우리 기장도 아마 위와 같은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밤새고 일해서 몸은 피곤한데 햇빛 봐서 쫌 깼나 싶다가도 본인 생체시계는 유럽에 맞춰져 있고 밤에 잠은 안 오고 근데 벌써 한 시간 후 출근이라네~~~ 토막잠자서 몸은 피곤한데 눈은 떠야겠고 다시 또 열몇 시간을 가야 하고~~~

기장은 베를린 사람이었는데 그 후 두 번 정도 베를린 공항에서 유니폼 입고 마주쳤다. 그때마다 나 보고 너 서울 갔다 왔어??? 또??? 오 마이갓 이런다.


이번에는 비행 전후로 교육이 있어서 땅에 있는 시간이 길었다. 비행 못해서 답답하긴 한데 시차 뒤틀리는 일 없이 푹 잘 수 있는 건 좋았다. 이제 또 슬슬 짐 싸고 비행 갈 준비 해야지~ 이번 레이오버 때는 제발 푹 자고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비행일기] 화장실 체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