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마지막 대목에서 아내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일본 땅에서 옥사한 스물여덟 청년이 가여워 한순간 감정이 복받친 모양이다. 사실 '별 헤는 밤'은 윤동주가 연희전문 다닐 때 쓴 시니까 이국 땅 옥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두 아들 키워낸 어머니로서청년이 간직한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가슴에 저렸나 보다.
우린 가끔 북촌, 서촌 일대를 운동 삼아 걷는다. 예전에 살던 동네이기도 하거니와 고등학교 시절 매일 통학하던 추억 어린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부암동 성곽 동네를 끼고 인왕산 스카이웨이 길 변에 있는 초소카페를 들렀다가 '수성동계곡'을 찾기로 했다. 수성동계곡이 마지막 행선지가 된것은 조선 중기와 일제강점기에 많은 예술가들이 찾았던 곳으로 그림도 그리고 글에 대한 영감도 얻을 만큼 경치가 수려한 곳이라고들 하기 때문이다.
지난번 옥인동을 쑤시고 다닐 때는 필운대로 자락에 있던 '송석원'터 기둥만 확인했었다. 이곳도 경관이 뛰어났던지 조선 중기 중인 문학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는 곳이다. 지금은 흔적도 찾기 힘들고 비탈진 길에 연립주택들만 늘어선 곳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순정효황후 윤 씨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이 매국의 대가로 이 터에 프랑스식 큰 석조건물을 짓고 살만큼 풍광이 좋았었단다.
자하문고개에서 성곽길을 올라가는 초입에 '윤동주 문학관'이 보인다. 우리가 살 때만 해도 사람들이 찾을 만한 곳이라곤 창의문과 김신조 사건 때 순국한 경무관의 동상만 있던 썰렁한 동네였는데 문화 명소를 만들어서인지 등산객들만 아니라 윤동주 문학관을 찾는 젊은이들이 꽤 생긴 것을 보면 얼마 안 되는 세월 동안 나라가 많이 발전하긴 했나 보다.
시와는 크게 인연은 없지만 영화 <동주>로 익히 윤동주 시인의 생애는 애절하고 맑고 순수함이 각인되었던 터라 아담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 그와 잘 어울려 보인다. 진열되어 있는 것이라곤 낡은 시집들 뿐이지만 의미를 부여해 가며 해설하는 사람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젊은이들이 꽤 있는 것을 보니 우리에게서도 어느새 유럽에서 본듯한 문화의 격이 느껴진다.
전시실과 중정을 지나면 창문도 없는 좁은 실내에서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를 그린 짤막한 영상이 상영된다. 암울한 일제강정기에 시인의 조국애를 그려서인지 좁은 실내와 고뇌에 찬 시인과 암울한 영상이 혼연일체가 된 듯하다. 그래서 아내가 더 눈물이 났으려나?
문학관을 나와 성곽길을 따라 걸으면 인왕스카이웨이 길과 만나고, 도로 옆 좁은 산책길을 걷다 보면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서울시내가 뜨문뜨문 보이다가 길과 어울리지 않는 카페를 만나게 된다. 이곳도 이미 명소가 되었는지 사람들로 붐비고 주차 공간이 모자라 도로 한편에 여러 대의 승용차가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 잠시 쉴 겸 커피와 모카 번을 시켜놓고 스마트폰을 검색하며 수성동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본다. 생각보다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고, 산 쪽으로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아 어렵지 않게 수성동계곡을 찾는다.
겨울 계곡이라 앙상한 나뭇가지와 녹다 남은 흰 눈이 계곡 길에 남아있지만 상상의 나래를 펴면 멀리 보이는 인왕산 정상, 굽이 흐르는 물길, 푸르디푸른 나무숲, 좁은 계곡에 가로 놓인 돌다리가 겸제선생이 그린 한 폭의 동양화 '수성동'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고궁이나 건축물뿐 아니라 찾아보면 사대문 안 곳곳에 지금도 공감할 만한 삶의 흔적이 남아 전해진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도 기억이 하지만 못 먹고 못살던 몇십 년 전 경복궁이나 광화문 앞 도로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또 십여 년 전만 해도 수성동계곡도 시범아파트가 계곡을 메우고 있었다고 한다. 문화를 느끼고 옛 것을 새롭게 되살리는 것은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나이 먹고야 느낄 수 있는 새삼스러움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