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말쯤 대학교 친구 E, 일명 지구에게 시집을 선물했다. 해가 바뀌기 전 한 번은 더 만나자고 함께 다짐하던 차에 지구네 직장 근처로 출장 갈 일이 생겼다. 취업 이후 거주 지역이 달라진 우리가 평일 당일에 약속을 잡는 건 흔치 않은 기회였다. 그날은 아직 겨울도 아닌데 유독 손이 얼 것 같이 바람이 매서웠다. 추위를 피해 들어간 교보문고 합정점은 설레는 마음으로 지구를 기다리기에 충분히 넓고, 또 연말 핑계로 책을 선물하고 싶어 지게끔 충분히 아늑했다.
사실 책 선물만큼 망설여지는 게 없다. 문장을 써 놓고 보니 망설인 것 치고는 그간 책 선물을 많이 했다. 정정하겠다. 나는 가까운 이들에게 책 선물하길 좋아하면서도 선정 과정에서 언제나 오래도록 고민한다.(고로 망설이는 건 진짜다.) 고민의 지점은 크게 두 가지다. 이미 읽었을까 봐 또는 읽지 않을까 봐. 전자가 조바심 나는 이유는, 나의 경우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펼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책 구매보다 도서관 이용이 익숙해서일지도 모른다. 상대는 재독을 좋아할 수도 있겠으나, 내가 선물한 책을 받고서 이미 읽었다고 말한다면 '어제와 같은 식단을 나로 인해 연달아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미안하고 김샌다. 따라서 받을 사람의 독서 취향을 고려하되, 이미 접했을 법한 세부 분야는 우회해야 한다. 가령, 정세랑 작가님 작품을 좋아하는 이에게 발 빠르게 신작을 선물하는 게 아닌 이상 작가님의 공동집필 책도 선택지에서 제외하길 바란다.(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제안이다. 엉엉) 후자 고민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의연하게 답해보겠다. 책을 읽는다는 게 참 쉽지 않다. 당장 내가 그렇다. 모처럼 여유가 생겨 에코백이 빵빵해지도록 도서관에서 대여섯 권씩 빌려왔다. 대출 1회 연장은 선택 아닌 필수. 연체 직전 반납일자까지 완독한 책이 한 권이라도 있으면 대견할 따름이다. 소위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책과 멀어지는 이유야 다양하다. 업무가 바빠져서,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서, 저녁 먹고 나니 잠이 솔솔 와서, 유튜브 쇼츠 무한굴레에 빠져서, 책 내용이 기대와 달라서/어려워서/지루해서, 읽으려면 읽을 수 있겠는데 어쩐지 그냥...... '읽는 척'만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이것들이 핑계라 생각하지 않는다. 수많은 정보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세상에 급급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다가, 갑자기 빗방울 하나를 들여다보며 사유해 보라고 하면 그게 쉬울까. 꼭 일 때문에 바쁜 게 아니더라도, 긴 호흡의 글을 음미할 수 있을 만큼 전환되는 데까지의 여유는 분명 없다. 이 때문에 상대가 읽지 않는 결말에 이르더라도 납득할 수 있다. 한 장이라도 넘겨 보길 바라며, 대신 안 읽더라도 부담으로 여기지 않길 바라며 구매 전 최선을 다해 고민할 뿐이다.
지구가 이 책을 읽었을까? 엇 이 책 다른 서점에서 지구가 재밌다고 추천했던 건데! 프리랜서, 일, 브랜딩, 노동...... 같은 섹션에 묶인 책들이라면 흥미로워할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지구는 일 생각 그만할 필요가 있어. 설령 지나치게 일하는 사회에 대해 비판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더라도, 오히려 읽는 내내 일을 떠오르게 할 수 있으니 이번엔 패스. 정보 습득한다는 부담 없이 마음 편하게 펼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소설책 추천은 자신이 없고...... 이 책 저 책 펼쳐보다 시집이 모여있는 책장에 눈이 갔다. 한 권에 여러 내용의 시가 담겨 있어 흐름 끊길 걱정이 없다. 크기가 작고 무게도 가벼워 이동시간이 길 때 챙겨봄직하다. 그럼에도 여태 한 번도 시집을 선물로 고려하지 않았던 건 내가 익숙하지 않은 장르여서다. 대학 입시 때 교과서와 수능연계교재에 수록된 시를 읽을 때는 적어도 어떤 방향으로 시를 해석해야 할지 질문과 오지선답을 통해 유추했다. 특정 단어에 동그라미(긍정), 세모(부정)를 표시한 후 참조 지문에 언급된 시대적 배경을 읽으면 다시 시로 돌아가 상징하는 바를 적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문제풀이가 필요 없는 시들이 더 많았다. 섬세한 단어 나열로 풍경이 절로 그려지고, 적재적소에 행과 연을 구분해 시 전체가 하나의 대칭 그림처럼 보이고, 소리 내어 혀를 굴려보고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운율감과 울림소리(ㄴ,ㄹ,ㅁ,ㅇ)가 반복된다는 것에 감탄한 적이 있다. 하지만 대개는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다음 페이지로 넘기곤 했다. 답이 없는 것에서 답을 찾으려 하고, 그것이 시를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해 위축되곤 했다.
그럼에도 시집 선물에 욕심을 낸 건, 그 해 여름 지구가 함께 하는 독서모임에서 <인생의 역사>라는 책을 소개해줬기 때문이다. 과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집필했던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삶과 연관된 스물다섯 편의 시를 꼽고 그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산문으로 덧붙인 구성이었다. 발제 당시 지구가 신형철 평론가님의 책은 나 스스로도 생각해 봄직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실제로 그 책을 읽으면서 시 전편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고, 두어 편이라도 내 마음속에 울림을 주면 그거로도 충분하다는 마음가짐을 처음 가져본 것 같다. 지구도 아직은 풀이가 있는 시집이 익숙하다고 했다. 서로 시에 대한 용기를 나누고 싶어, 신형철 평론가가 해설을 남긴 진은영 시인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골랐다. 어떤 시에 내가 건네고 싶은 문장이 있는 걸 확인한 후에.
올해는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멤버십 구독의 일환으로 제공한 2024 자선 시집 <잠든 사이 친구가 왔어>를 읽고 있다. 국내 여러 시인이 발간한 시집 중 일부 시를 발췌해 엮은 형태인데, 진은영 시인의 시는 없다. 대신, 지구에게 선물한 시집의 추천글을 썼던 안미옥 시인과 황인찬 시인의 시가 수록돼 있다. 내가 책을 선물할 때의 마음처럼 시인들도 여러 단어 중 고르고 골라 시를 짓는 모습이 떠오른다. 시가 사람이라면 이제는 반갑게 눈인사 정도는 먼저 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상대가 먼저 말 걸까 봐 일부러 모른 체하지는 않는 정도로 진전했다. 초등학생 때는 동시 짓기와 표어 작성에 제법 자신감을 가졌었는데. 시에 대한 나의 마음을 시로 표현하며 마무리해보고자 한다. 제목은 '유0하는 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