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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만복 Jun 14. 2024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GRIT)

238명중 226등.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 나의 학과등수이다. 학사경고라는 문구와 함께 집으로 성적표가 발송되었다. 이른 아침에 어머니가 가장 먼저 발견했고, 방에서 자고 있던 나에게 감정을 터뜨리며 화를 냈다. 기계공학과를 다니며 학업에 대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생각없이 놀면서 1년을 보낸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보통의 남들처럼 1학년을 마치고 군복무를 했다. 전역을 앞두고 있을 때쯤 학교에 복학해야 한다는 것이 엄청나게 부담이 되었다. 공과대학의 특성상 공학적 기본지식이 부족하면 그 다음 단계의 수업은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다. 나는 학사경고를 한번 받았고, 전공에 대해 아는것이 전혀 없었다. 군부대 안에서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지내다 보니 가깝게 지내던 후임이 신경 쓰였나보다. 나에게 조언을 해준다.


"김 병장님, 우리 일생을 24시간으로 비유하면, 20대인 지금은 새벽 5시밖에 되지 않은 겁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니깐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걸 보니 진심이 담긴 조언이었던 것 같다. 이 조언은 내 변화의 시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


2학년으로 복학하면서 나는 달라지기로 결심한다. 아침7시에 오는 통학버스를 타고 8시에 학교에 도착했다. 수업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해서 제일 앞자리를 맡았다. 교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는 항상 내 자리였다. 수업이 끝나고 시간이 남으면 무조건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밤10시에 운행하는 마지막 통학버스를 타기 전까지 도서관에 남아서 전공공부를 했다. 노는 것에는 완전히 관심을 끊었다. 남들 놀때도 공부하고, 남들이 공부할 때는 더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91명중 24등.(1학년는 학부이고, 2학년이 되면서 학과로 나뉘기 때문에 인원 변동이 있다) 한 학기동안 노력의 결과였다. 성적표를 받고 든 생각은 '하면 되는구나, 그리고 어떻게 해야 더 과를 낼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다.

'남들보다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한다.' 내가 내린 단순한 결론이었다.  통학하는 시간은 편도1시간, 왕복2시간 이었다. 이렇게 버려지는 시간을 가치 있는 시간으로 바꾸고 싶었다.  부모님께 학교와 가까운 곳에 자취를 하겠다고 했다. 부모님께서는 자취는 안 된다고 단칼에 잘라 말했다. 나에 대한 신뢰가 없었고, 자취를 시켜줄만한 금전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 가까운 곳에 거주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로 설득하기에는 전달할 내용이 너무 많았다. 많은 내용을 전달하기에는 글이 낫다고 생각해서 A4용지 4장 분량의 설득문을 작성한다.


대략적인 내용은

0. 부모님이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이 글을 써서 진심을 전달해 드리려한다.

1. 1학년때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

2. 자취를 하면서 얻은 하루 24시간을 버리는 시간 없이 가치있게 쓰겠다.

3. 아낀 시간을 토대로 성적을 향상 시켜 장학금을 받겠다. 지금 당장은 자취를 하는 비용이 들겠지만, 장학금을 받으면 결과적으로 이득이다.

4. 성적향상을 통해서 좋은 기업에 취업하겠다. 초봉 4천만원(당시 2011년도 기준이다.) 이상 주는 기업에 취업하겠다.

5. 앞에 나열한 내용들은 반드시 지킬 것이다.


학교 앞에 자취를 함으로써 이어지는 결과가 장학금과 취업이라니. 이 설득문을 보고 허락하지 않을 수 있는 부모가 있을까. 부모님은 설득문을 본 후 이틀정도 생각할 시간을 가지셨고, 결국 승낙 하셨다. 없는 형편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부모님께 받은 지원은 용돈을 포함해 한 달에 40만원. 학교 앞에 가장 저렴한 19만원짜리 고시원을 구했고, 남은 21만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했다. 가장 많이 나가는 비용은 매일 지출해야 하는 식비였다. 하루에 7천원을 쓰면 딱 한달 30일을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점심은 친구들과 학생식당에서 사먹었기에 3천원 정도가 나갔다. 그러면 남는 돈은 4천원. 아침과 점심 각각 끼니당 2천원 아래로 사용해야 됐다. 아침은 보관이 용이한 멸균우유에 시리얼을 타먹었다. 저녁은 햇반에 고추장을 비벼먹거나 런천미트(스팸은 비싸서 못 사먹었다)를 먹었다. 질려서 먹기 싫을 때는 근처 편의점에서 2천원 이하의 샌드위치를 사먹었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초라하다거나 외롭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목표가 뚜렷했고, 목표 이외에 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모님과의 약속이 있었기에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야했다. 고시원에서 대학교 강의실까지 걸어가는데 15분 정도가 걸렸다. 걸어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항상 전공에서 배웠던것을 떠올렸다. 도서관에서 아무리 고민해도 못 풀었던 전공문제가 있었는데, 걸어가면서 계속 생각하다가 며칠 만에 문득 해결방법이 떠올라서 풀었던 경험도 있었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무조건 도서관에 있었다. 통학을 할 때는 통근버스 시간 때문에 밤10시까지밖에 못 있었지만, 자취를 하니 도서관이 문 닫는 12시까지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1학년 때와는 다른 생활을 지속하다 보니, 바뀐 나를 비난하는 친구도 생겼다. "공대에서 학점 4점 넘는 상위권 애들은 그쪽으로 머리가 타고나야 되는 거야. 니가 해봐야 되겠냐."

나는 의미 없는 논쟁을 싫어했기에 그 자리에서 대꾸는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니같은 놈들이나 그렇게 생각하겠지. 나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할거고, 결과로 보여줄게'


다음 학기에 4.23이라는 학점을 받았고 학과에서 7등을 했다. 높은 학점 덕분에 학교에서 상위권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는 신축 기숙사에 들어갔다. 19만원짜리 고시원 생활에서 신축 기숙사로의 이사. 생활의 질이 크게 향상되었다. 기숙사 식단은 균형 잡힌 4가지 반찬이 나왔고 맛도 훌륭했다. 기숙사 방은 냉방/난방비를 내지 않아도 되어서 항상 쾌적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햇반에 고추장을 비벼 먹지 않아도 되었다. 나를 비난했던 친구는 더 이상 내 앞에서 헛소리를 하지 못하였다.


3학년이 되어서는 주변의 인맥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목표를 가진 아이들과 자연스레 친밀해졌다. 교내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다 보니 우리 학과뿐 아니라 다른 학과에 과탑 수준의 학우들, 학생회장 등과도 교류가 잦아졌다. 교수님들의 나에 대한 인식이 점점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몇 학기 동안 제일 앞 자리에 앉아서 아이컨택하며 집중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던 거 같다. 질문도 제일 많이 했고, 수업자료나 시험문제의 오류도 제일 먼저 찾아냈다.

     

4학년 1학기가 끝나고 4.5의 학점을 받았다. 만점이었으니 126명 중에서 당연히 1등이었다. 학과장 교수님이 외국계 대기업에 학과장 추천으로 입사시켜 주겠다고 한다. 거절했다. 또 다시 연락이 와서 이번에는 공기업 중 한 곳에 입사시켜 주겠다고 한다. 또 거절했다. 교수추천을 통한 취업은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내 힘으로 원하는 곳에 취업하고 싶었다. 그 당시 나는 에너지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졸업 논문을 신재생에너지와 수소에너지에 관해서 썼다) 대표적인 에너지 분야인 발전소 근무를 희망하고 있었다. 졸업 후, 전 계열의 전소 업무를 하는 기업에 입사했다. 내가 원하던 형태인, 화력발전소 엔지니어로서 만족스럽게 근무할 수 있었다. 급여는 부모님께 약속드렸던 금액보다 높게 받았다.


결과적으로, 부모님께 드린 설득문에서 제시했던 모든 약속을 완벽하게 지켰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고, 성적을 올렸으며, 장학금을 받았고, 원하는 기업에 취직했다. 수년간에 걸친 오랜 과정이었고 힘든 적도 많았지만, 과정 자체를 즐겼다. 그로부터 따라오는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 한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그때 그 시절 의지와 노력 이어갔던 기억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고 힘이 난다. 결과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뭔가를 이루기 위해 열정을 지속했던 경험이 내 인생을 지지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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