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진 어릴 적 살던 옛날집은
가끔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큼의 강렬함을 지니고 있다.
마당이 넓게 펼쳐져 있고 계단이 있는 ㄴ자의 단층집이었는데
집의 한쪽 귀퉁이에는 작은 사글셋방이 있었고 또 다른 한쪽 구석에는 지하실이 있었다.
사글셋방에 살던 20대 중후반쯤의 여자는 미용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가끔 나를 자기 방으로 초대해 내 머리를 구루프(롯드)를 사용해 돌돌 말며 연습을 했다.
계단 밑 구석에 있던 지하실은 어두웠고 곰팡이의 쿰쿰한 냄새가 났다.
엄마 심부름으로 지하실에 뭘 가지러 가면
귀뚜라미 같은 벌레들이 자주 출몰해 울음이 터지기 일쑤였다.
대문에서 가까운 곳엔 따로 마련된 외부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유치원 때까지도 이 화장실만 가면
뚫려 있는 구멍으로 온몸이 풍덩 빠질 것만 같아
화장실 문을 활짝 연 채, 엄마 손을 붙들고 볼 일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옛날집이 그리운 이유는
봄이면 화단에 핀 사루비아(샐비어) 꿀물을 빨아먹고,
여름이면 헐벗은 채 마당 수돗가에서 호스를 힘껏 눌러 장난을 치고,
가을이면 감을 깎아 실을 꿰어 내어 계단 난간에 매다는 엄마를 돕고,
겨울이면 아빠가 밤늦게 사 오는 군고구마, 군밤, 붕어빵을 기다리는...
그런 평화로움과 소소한 재미가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옛날집의 옆집에는
전라도 출신의 아줌마와 경상도 출신의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두 분은 전라도와 경상도 특유의 지역색을 강하게 갖고 있는 분이었고,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엔 온 동네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아주머니는 박 씨 아줌마로 불렸는데
명리학 공부를 조금 해서 동네 아줌마들을 모아놓고 사주를 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우리 엄마도 공짜를 좋아하는 마음과 호기심이 섞여 박 씨 아줌마에게 사주를 보게 되었다.
자신과 남편의 사주를 보고 어느 정도 신뢰가 든 엄마는 아들딸의 사주도 박 씨 아줌마에 부탁했다.
몇 시간 뒤, 찡그린 얼굴로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안방에 이불을 펴고 모로 누웠다.
내가 다가가 엄마 손을 만지작거려도 나를 보지 않고, 한숨만 푹 쉬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나에 대한 박 씨 아줌마의 사주풀이가 썩 좋지 않아 속상한 마음에 그러셨다고 한다.
미신이라며, 안 믿는다면서도 한숨을 쉬는 엄마를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가 전해준 박 씨 아줌마의 사주풀이의 핵심은 이거였다.
-아니, 애한테 고(孤) 자가 들었어! 아주 일평생 외로울 운명이야!
어린 시절 나는 지금과는 딴판으로 소심한 아이였는데,
그래서 외롭게 살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엄마는 걱정을 하셨던 거다.
옛날집을 허물고 3층집을 짓고, 초등학교 입학과 졸업, 중학교 입학까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심한 내 성격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고,
나의 어떤 사소한 행동에 그 성격이 반영될 때면,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입버릇이 되어
-고(孤) 자가 들어서 그래. 어휴...
라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것을 보면,
한숨과 이 대사의 조합은 꽤나 반복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전에는 그냥 넘어가지던 엄마의 탄식이 어느날 갑자기 오기가 생길 정도로 싫었다.
아마 사춘기였나 보다.
신이 나를 만들 때 0.0001그램 정도 넣다가 그나마도 반은 흘려버린 '외향성'이란 녀석을
나의 깊숙한 어느 곳에서 끄집어내겠다고 결심했다.
-내 운명을 바꿀 테야!
엄마의 한숨과 그 대사가 조화를 이루어 내 가슴에 와 박혔듯, 나의 사춘기와 이 대사는 그야말로 최고의 콜라보를 이루며 새 학년, 나의 환골탈태를 선언했다.
나는 인싸 중의 인싸가 되어, 쉬는 시간마다 전교를 누비고 다녔고 반장도 되었다. 강박적으로 외로움이란 단어가 범접할 수 없게, 인간관계를 넓히고 활달하게 살았던 것 같다.
2022년 1월의 어느 날,
나는 친한 친구의 손에 이끌려 한 사주카페를 가게 되었다.
친구가 겪고 있는 당시의 상황이 답답하기도 하고, 심심풀이로 보러 가자는 이야기였다.
신년도 됐겠다, 정말 내 사주에 외로움이란 글씨가 새겨 있나 궁금하기도 했다.
풀이를 하는 선생님은 풍채가 좋은 아저씨였고 카페의 곳곳엔 달마대사 그림도 걸려 있어, 선생님이 달마대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이 선생님의 사주풀이엔 고(孤)자가 없었다. 심지어 매우 좋은 사주라고도 했다. 다만 곧 인생의 전환점이 닥칠 거라는 기묘한 말을 했다.
- 2025년이나 26년쯤 직업을 바꾸게 될 거야. 꽤나 연봉이 좋은 곳으로 갈 거고, 큰돈을 벌게 될 사주야.
당시의 나는 직업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서 의아해하며 물었는데, 그는 또다시 기묘한 말을 했다.
- 23년이나 24년에 크게 힘들겠어.
저주와 같았던 고(孤) 자는 선무당의 잘못된 풀이였을 수도 있지만, 나의 노력으로 이겨냈다. 그런데 또 힘들다고? 집에 돌아와서는 달마대사 선생님도 선무당이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 힘들겠다는 일은 실제로 벌어졌고, 죽음을 생각할 만큼의 고통을 겪었다. 모두의 외면을 받았을 때는 '애가 고(孤) 자가 들었어! 고(孤) 자가!' 하는 박씨아줌마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도 마음 어딘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만 같다.
그의 사주풀이가 맞아 들어가자, 나는 모로 누운 엄마의 한숨을 그대로 따라 하게 됐다.
자신과 자식의 일에는 작은 미신이나 말도 조바심이 나고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되어서야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말한 예언(?)과도 같은 그 말,
내년에 직업을 바꾸게 될 거라는 말도
실제로 벌어질까?
힘든 시간을 보내며
의원면직을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나는 이곳에서 아직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춘기 때의 오기와 같은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오기로 나의 주홍글씨를 없앴으니,
지금 이 생각으로도 기필코 가능할 거라고 믿는다.
사주팔자가 전부는 아니니까.
정해진 운명은 내가 바꾸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