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대한 이해로서의 문법
나는 학생일 때 영문법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성인이 되며 영어를 어느정도 구사하게 되었는데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학교 3학년 즈음 문법 문제집을 푸는 것에 재미를 느꼈던 때가 영어를 할 수 있게 된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문법에 중심을 두고 영어를 공부하면서도 꽤 최근까지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던 문제 혹은 설명이 있었다. 하나는 3형식과 4형식의 전환, 둘째는 관계대명사의 '원래 위치' 였다.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5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학교문법에서 3형식은 "주어 타동사 목적어 전치사 전치사의 목적어", 4형식은 "주어 수여동사 간접목적어(~에게) 직접목적어(~을/를)" 구조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I gave the book to him". (3형식)
"I gave him the book". (4형식)
"나는 그에게 그 책을 주었다".
와 같이 두가지 방식으로 문장을 구성할 수 있다. 여기에 함의된 바는 3형식 문장에 이에 응당 따라오는 4형식 문장이 이미 존재하고 이것은 시험에 낼 수 있을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관계대명사의 원래 위치에 관한 이슈도 비슷하다. 관계대명사는 기본적으로 두 절을 하나의 문장으로 묶는 하나의 수단이다. 예를 들어
"The girl that showed up late yesterday is my girlfriend".
"어제 늦게 왔던 저 여자애가 내 여자친구다".
와 같이 사용한다. That은 관계절 "-showed up late yesterday"에서 주어 역할을 하는 대명사로 해당 절을 안고 있는 바깥 절과의 의미상 공통 요소인 "the girl"을 수식하며 두 절을 하나로 잇는다. 이러한 구조를 다루는 문법 문제에서는 왕왕 해당 관계대명사의 원래 위치가 어디인지 묻곤 한다. 가령 "Can I ask what you eat regularly for your health?" 에서 What은 해당 성분이 이끄는 절 안에서 원래 어디에 위치하는지 등을 물을 수 있다. (정답은 eat의 목적어 부분, 즉 eat 다음이다) 이 역시 해당 문장에는 표면에 드러난, 고정된 문장이 아닌 다른 문장이나 문형이 논리적으로, 문법적으로 추론 가능하다는 점을 전제한다.
나의 불만은 이러한 전제에 있었다. 어떻게 하나의 고정된 문장에서 다른 문장을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인가? 가령 두 문장은 그냥 서로 다른 문장이 아닌가? 꽤 오랬동안 나에게 이같은 문제나 설명은 언어를 마치 일반화된 공식을 통해 외우도록 요구하거나 아니면 교과서의 예문을 모두 암기하게 강제하는 접근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언어라는건 말하기 나름이기에 유동적이며 문화의 일부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추론이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불만, 즉 문법의 복잡성과 많은 내용에 대한 학습 측면의 반발은 특별하지 않아 보인다. 언어를 문법 위주로 가르치는 것은 죽은 언어라던가, 외국어를 커뮤니케이션 중심으로 수업해야 한다는 말은 쉽게 들을 수 있다. 특히 언어지식을 전달하는 영어교육 기조에 대한 비판은 상식에 가까워진 듯 하다. 예를들어 영어 회화를 강조하는 학습 앱 광고에서 문법지식을 공부하는 행위를 구식 학습법으로 매도하는 카피를 찾아보기는 매우 쉽다.
하지만 지금 나의 예전 의문에 스스로 답한다면 언어와 문법은 충분히 배울 가치가 있고 상당한 이론적 타당성 위에 기초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문법의 종류나 교수법의 문제 등은 일단 차치하고). 내가 생각을 바꾼 이유는 문법적 설명에 어느정도 명료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 1. 3형식 문장과 4형식 문장의 전환
서로 상응하는 3, 4형식 문장이 문법적으로 옳게 구성되기 위해서는 동사에 더해 최소한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이는 국어 문법 시간에 나오는 서술어의 자릿수 개념과 일치하는 것으로 언어학적으로 동사가 요구하는 이러한 요소를 '논항(argument)'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각 논항은 의미상의 역할을 맡는데 이를 '의미역(Theta-role)'이라고 한다. 의미역은 말 그대로 문장 요소가 가지는 의미적인 역할이며 이는 언어보편적이다. 이 두 개념은 일견 어려워 보이지만 예시와 함께 보면 상당히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a. Kevin bought a cup for his mother.
b. Kevin bought her mother a cup.
"케빈은 어머니를 위해 컵 하나를 샀다".
여기서 문장의 서술어인 동사 buy (과거형 bought)가 요구하는 요소는 a와 b에서 모두 3개이다 (행위자(AGENT) 인 Kevin, 주제(THEME)인 a cup, 목적지(GOAL)인 his mother). 이들은 앞선 설명처럼 '논항' 이 되며 서술어인 buy가 요구하는 요소이다. 그리고 이 논항들의 의미적 역할은 3형식 문장 a와 4형식 문장 b에서 서로 달라지지 않는다. 문장의 형식이 바뀌어도 컵을 사는건 케빈, 케빈이 사는 물건은 컵, 컵을 받는 것은 케빈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법적으로 이를 실현하는 방법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장 a와 문장 b는 의미적으로 충분히 유사하며 그 실현 방법을 바꾸어보는 연습은 그 두 방법 모두 아주 흔히 쓰이기 때문에 꽤 유의미하다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문장의 배치나 정보구조에 따른 표현적인 의미, 시적 운율 등 충분히 많은 변수가 있지만 의미역이 보존된다는 기본적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3형식 문장인 a를 바탕으로 의미를 바꾸지 않은 채 4형식으로 바꾸라는 문제는 꽤 중요한 언어적 개념을 다루는 것이다. 언어 보편적인 의미역과 논항을 기초적인 수준에서 다뤄보는 연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개념이 너무 어렵지 않냐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이미 서술어의 자릿수 개념은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다루어진다. 따라서 오히려 교과 통합적 이해를 도모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3형식과 4형식 문장을 전환하는 문제는 문장의 핵심적 의미와 구조간의 상관관계를 두고 연습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말 할 수 있다.
문제 2. 관계대명사의 원래 위치
원래 위치라. 아니 그 문장이 존재하지도 않는데 '원래' 위치라는게 도대체 어디 있는가? 이게 내 핵심적 불만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언어란 원래 대부분 현재로선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란 어휘를 비롯한 단어를 적절히 규칙에 맞게 '생성'해내는 체계로 이해할 수 있으며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하나의 증거이다. 이 글은 내가 작성하기 전에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여기에 나온 한국어 어휘와 문법이 아예 새로운 것인가? 그렇지 않다. 즉, '지금 현재는 없지만, 잠재적으로 생성 가능하다'는 것은 언어의 본질적 속성이다.
관계대명사의 원래 위치에 대한 이야기도 비슷해서 질문을 적절히 조성한다면 어떤 구성소의 원래 위치는 충분히 물어볼 수 있는 문제가 된다.
c. May I open the window which you have closed this morning?
d. John likes the teacher whom Marry hates a lot.
c의 관계대명사 which의 원래 위치는 어디인가? 통사론을 비롯한 이론 언어학에서는 더 정교하게 설명하겠지만 이는 그렇게까지 가지 않아도 해결 가능한 문제다. 앞에서 서술어는 해당 문장을 문법적으로 옳게 만들기 위해 요구하는 논항의 갯수가 있고 이를 자릿수라 부른다고 설명했다. 같은 이유로 which 이하의 관계대명사 절 서술어 CLOSE는 목적어 자리에 논항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에 which는 'closed'와 'this morning' 사이에 위치해야 한다. 이를 학교문법에서는 보통 '절이 불완전하다'고 설명한다.
d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서술어의 자릿수 개념으로 해결 가능하다. 다만 d의 경우 하나의 방법이 더 있다. 바로 격(case)이다. 격이란 아주 간단히 말해 문장에서의 문법적 자격에 대한 표시이다. 예를들어 같은 1인칭 대명사 'I'라 해도 주어 역할을 하는 주격이라면 'I'의 형태로, 목적어 역할을 하는 목적격이라면 'me'의 형태로 나타난다. 반대로 말하면 의미가 같더라도 'me'는 주어 역할을 맡을 수 없다. whom의 경우 그 격이 목적격일 때만 실현되는 형태이다. 따라서 관계대명사 절 안에서 whom은 목적어 역할을 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hates-'뒤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3, 4형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여기서 사용한 방식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문법적 개념을 잘 숙지하면 복잡한 언어 현상을 질서정연하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격(case)과 같은 개념은 영어 뿐 아니라 한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 사실상 모든 언어에 보편적인 요소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 인간 생활에 아주 중요한 요소이며 깊은 탐구의 대상이다. 따라서 마치 과학 시간에 입자들을 배우고 사회 시간에 여러 사상가들의 윤리관을 살펴보는 것과 같이 공부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래서, 문법 공부는 중요하다 (그리고 좀 재밌다)
이 글에서 여러 이야기를 하며 사실 학교 문법과 이론언어학적 문법을 섞어 사용하였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문법의 종류와 크게 상관이 있지는 않다. 개인적 의견으로는 부분부분 아쉬운 지점을 느끼지만 동시에 학교문법 체계도 문법적 이해를 시작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문법을 전체적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권하는 바이다.
문법을 잘 이해하면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우선 문법을 통해 방대한 언어 현상을 좀 더 질서 정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아주 생소한 언어 자료를 본다고 상상해보자. 언어는 규칙과 한정된 어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질서를 가지고 있지만 예를 들어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와 같은 아주 낯선 언어를 처음 본다면 거의 랜덤한 배열로 보이지 않을까? 이를 하나하나 고민하고 처리하는 것은 인지적으로 매우 부담되는 일이다.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이런 방식으로 배운다면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비효율적일 것이다. 여기에 질서를 부여해 주며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장치가 문법이다. 적은 수의 문법적 원리로 많은 현상을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의 본유적인 속성으로 어찌 본다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다양한 문장을 일반적인 원리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은 적지 않은 재미를 주기도 한다.
또한 한 언어에 대한 문법적 이해는 타 언어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앞서 서술어의 자릿수 개념을 통해 영어와 한국어를 엮어 설명했다. 서술어의 자릿수 개념, 격(case) 등은 한 언어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며 여러 언어, 혹은 인간 언어 자체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문법에 대한 개념적 이해는 영어 뿐 아니라 한국어, 더 나아가 제2 외국어 이해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혹시 언어라는 현상 자체에 흥미가 생긴다면 그 이상의 탐구에 더할 나위 없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개인적 바람으로는 영문법 학습이 커리큘럼의 시간적 측면에서 보다 집중적으로 이뤄졌으면 한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문법 수업을 보면 한정된 내용이 너무 넓게 산개되어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교수법이나 교육학적인 고민이 담겨있는 결과겠지만 문법이 앞선 내용을 기반으로 다음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 내용이 지나치게 퍼져 제시되는 것은 아쉬울 따름이다. 또한 학교 문법을 좀 더 간소화하면서도 언어학적인 성과를 일부분 반영하면 좋을 듯 하다. 본문에 사용한 서술어의 자릿수 개념을 비롯, 음운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 정도는 사실 국어 문법 교과에서 이미 제시되고 있는 부분이다. 통합적이고 설명력이 높은 이론을 여러 예문과 연결해보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물론 문법적 접근만이 언어에 대한 이해, 학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커뮤니케이션적 측면을 연습하거나 문화와 언어가 접하는 부분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구조적, 시스템적으로 모두 포착되지 않는 언어현상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언어라는 시스템의 핵심적 특징이 문법임이 달라지진 않는다. 그래서 문법학습에 대한 거부반응이나 적개심을 조금 접어준다면 좋겠다. 문법은 상당히 중요하고 또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