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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로 Dec 28. 2023

영문과생, 옆 전공으로 바꾼 이야기


내가 공부한 한국외대, 사진은 올해 축제에서 직접 찍었다.

1.

나는 올해 초 한국외대 영미문학 문화학과(통상 영문과)를 졸업하고 자대 자과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입학 후 문학연구방법론, 현대비평(문학이론)을 수강했는데 후술하겠지만 수업의 내용과 교실의 분위기는 내가 생각한 '문학' 그리고 '대학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과는 아주 달랐다. 결론적으로 나는 현재의 문학전공과 맞지 않다고 느꼈고 서강대 영문과로 옮겨 지금은 언어학을 전공하고 있다. 어차피 같은 영문과 아닌가 싶을 수 있겠지만 그 내부에서도 문학과 언어학 분야가 견지하는 기본적 접근방법, 대상 텍스트는 아주 다르다. 나는 지금 결과적으로 만족스럽게 공부하고 있다.


학부 공부가 끝나갈 무렵 나는 영어/언어 분야에서 석사과정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해 외대 내부 영어대 3과(언어학과 언어공학 위주의 ELLT-영어학과, EICC의 연장선상일 통번역대학원, 문학을 다루는 영문학과) 사이에서 고민했다. ELLT/영어학과는 요즘 소위 '유망학과'로 취급되는 곳이며 실제로 인기도 높다. 타교에서도 다루는 언어학을 기초로 전산학이나 컴퓨터과학적 응용에 집중해 음성이해나 텍스트처리 등을 다루는 곳이다. 물론 통사론(syntax) 등 이론언어학 전공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통번역대학원은 어학 분야 안에서 그 권위가 높으며 언어의 사용에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실용성도 높은 선택지이다. 마지막으로 문학은 내 1전공과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곳이며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영문과' 이미지와 가장 비슷한 곳이다. 시, 극, 소설 등 장르에 대한 연구나 문학이론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다. 


나는 이 세가지 선택지들 중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문학전공을 선택했다. 우선 EICC/영어학과의 경우 나 스스로 나의 수학, 프로그래밍 실력이 너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 포기했다. 물론 공부를 해 따라잡을 수 있겠지만 짧은기간 (겨우 석사지만) 전문가 비슷한 것으로 거듭나기엔 그 기초가 너무 부족했다. 미적분학이나 선형대수학, 컴퓨터과학을 방학을 이용해 어느정도 공부해보았지만 평균적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과 다르게 이론언어학 자체에도 상당히 자신이 없었다. 둘째로 나는 대학원에서 어느정도 이론적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실무에 집중하는 통번역대학원도 넘겼다. 그 결과로 영어라는 틀 안에서 운신의 폭이 넓어 보이는 영문학과(문학전공)를 선택했다.


2.

그런데 문학전공 수업에서 나는 교수님은 물론 다른 학생들 다수, 심지어 대부분의 수업 텍스트와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거듭 느끼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분야에 공감을 못했다. 


예를들어 이런 것이었다. 요즘 문학계, 그리고 이와 관련된 학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제로 섹슈얼리티(sexuality)와 퀴어(queer)가 있다. 아마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를 다루는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는 염색체와 생물학적 성(sex), 사회적 성(gender)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버틀러의 주장을 아주 조악하게 요약하자면 (이 요약은 분명 자세히 보면 틀렸을 것이다) sex에서 gender로 이행되는 순서가 생각보다 당연하지도 않고 혼재되어있으며 심지어 역전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수님이 성염색체의 배열에 의한 생물학적 양성적 성 결정이 허구적이라는 이야기를 XX와 XY의 배열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는 사례를 통해 지나가듯 하셨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약간의 의문을 느꼈다. 


왜냐하면 염색체나 성이라는 것 자체가 탐구의 대상인데 어떠한 결론을 내기 위한 전제로서 그렇게 지나가듯 이야기해도 괜찮은지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성 염색체의 배열이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 이를 통상적으로 클라인펠터 증후군이나 터너 증후군으로 부른다.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토의 시간에 앞선 성 염색체 배열의 사례를 이러한 증후군으로 분류한다는 것을 말했는데 대부분 증후군의 존재를 모르거나 이를 증후군이라고 부르면 안될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물론 추후 이러한 성 염색체의 배열이 증후군이 아니게 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이를 논하려면 생물학적, 병리학적 배경을 이해하고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가 느낀 이상함의 핵심이었다. 나도 생물학은 모른다. 하지만 주장 안에 반증으로 사용된 사례에 그런 병명이 있다면 그 원리나 배경이 뭔지를 알아보고 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는 그저 하나의 예시로 문학전공 내부에는 이러한 논의, 즉 그 자체로 확실하지 않으며 깊게 탐구해야 할 분야를 어떠한 주장을 위해 바로 전제하는 것이 많아 보였다. 또 다른 예시로는 주어를 전제, 중심으로 하는 인간 언어의 통사구조가 일종의 인간중심주의적 편견을 나타낸다는 주장이 있었다. 통사구조가 사람의 인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를 이야기하려면 주장과 근거, 결론 사이에 더 많은 연결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과서로 채택된 텍스트의 경향성 뿐 아니라 뭐랄까, 언어를 다루는 전공임에도 어떠한 용어를 '당연히' 쓰는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들어 강의 과제물 제목에 '혐오'가 들어갔을 때 이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셨는지 여쭤본 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대부분의 분들이 혐오에 뭐 다른 뜻이 있나요..? 정도로 말씀 하셨다. 그런데 '혐오'는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며 번역의 문제 등 다층적 이슈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이 만약 총체적, 맥락적 이해를 중시한다면 이러한 단어의 의미에 대해 더 정밀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느꼈던 에피소드이다. 


(쓰다보니 '나만 똑똑하고 다들 생각이 없다' 이런 식으로 읽힐까 걱정이지만 반대로 내가 맥락적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디 노여워 마시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최근 '핫 한' 텍스트는 대체로 정치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좁은 의미의 정당정치나 국제정치의 이야기를 한다기 보다는 이론적 작업 보다 액티비즘을 지향하는 성격이 강해 보인다는 의미로 정치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종의 대세나 흐름이 있어서 이에 거스르는 주장이 힘을 얻기 쉽지 않아 보였다. 물론 이를 뒤집으면 또 다른 대세가 되겠지만 나의 의지나 능력 부족으로 그럴 생각까지 하지는 못했다.


3.

결과적으로 나는 문학전공 1학기를 수료하고 23년도 2학기에 언어학 전공으로 서강대에 새로 입학했다. 언어학은 내가 학부 때 어려움을 겪었던 분야 중 하나이다. 통사론에서 문장 구조를 분석하여 그림으로 나타내는 트리 다이어그램(tree-diagram) 그리기가 가장 어려웠다. 그리고 음운/음성 분야도 눈에 보이지 않아 (귀로는 들리며 표기도 가능하지만) 어려웠다. 하지만 단계를 밟아가며 차근차근 이해하니 전체적 구조가 어느정도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어떤 주장이나 현상이 있을 때 이것이 왜 그런지 설명 가능했다. '설명 가능함'. 어쩌면 내가 같은 과 옆 전공으로 옮긴 이유가 이 속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 예로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에서 출발한 생성문법은 인간 언어가 무엇을 베이스에 두고 작동하는지 그 근간을 찾고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 (역시 잘 모른다, 오류는 귀엽게 봐 주시길) 이런 기조를 추상적, 환원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한 분야도 많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분석하는 대상을 명확히 하고, 용어를 일관적으로 관리하며 어떠한 주장이 펼쳐질 때 논증의 중간에 건너뛰어지는 듯한 현상이 적은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4. 


이론언어학은 보통 언어를 탐구하는 과학이라고들 한다. 언어학 뿐 아니라 보통 이에 속하는 분야는 환원적, 해체적이라는 비판을 듣곤 하는데 나는 환원은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대상이 있을 때 이를 구성하는 부분이나 원리를 탐구하고 밝히는 것 자체는 부작용이 없다. 해체적이고 분석적, 추상적으로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이 총체적 경험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의 음계나 멜로디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이해한다고 음악을 감동적으로 듣지 못하는가? 다만 그렇기 때문에 대상 전체나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의미 없다고 무시하는 태도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마 내가 느낀 문학 쪽의 분위기는 이러한 무시의 반작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계의 이러한 시각을 보고 다시 분석적인 시선의 사람들이 반발하고 이를 본 반대편의 사람들이 다시 화를 내고... 이런 모양이 아닐까 싶다. 분석은 분석이고 경험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안될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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