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노 Nov 19. 2023

우리는 안정을 찾고자 한다

 사람이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왜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가?', '왜 사랑에 목말라하는가?' 인간이란 타인과 조우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런 인간 보편적 특성에 따라 우리는 더 많고 다양한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 그리고 애정의 감정. 이에 대한 깊은 고찰은 '안정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오랜 고찰 속에 나온 나의 해답이다. 보이지 않은 무형의 감정을 톺아보는 자세는 사실 굉장히 어렵다. 또한, 감정이라는 것을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부정확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안정감의 연관성에 대한 견해를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이에 대한 인지적 관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갈망하고 원할 때 생기는 것은 다름 아닌 '집착'이다. 사랑과 애정을 갈구하고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만, 내가 왜 이 감정을 그토록 원하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원하기만 하는 것은 꽤나 위험한 행위이다. 이는 집착을 넘어 더 안 좋은 흐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에 우리 스스로는 내가 왜 사랑받아야만 하고, 사랑받고 싶은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당신들은 왜 사랑받고 싶은가? 왜 사랑받아야만 하는 존재인가? 물론,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모두 사랑받는 존재이다. 세상 밖으로 처음 고개를 내민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축복 하에 처음으로 타인의 손길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살아오고 성장하며, 우리는 우리가 받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베풀기도 하고,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그 어떤 이를 질투하기도 한다. 충분히 사랑받고 왔고, 지금도 누군가에게 알게 모르게 사랑을 받고 있을 우리들은 왜 그토록 많은 애정을 바라는 것인가. 한계, 즉 총량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측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보이지 않고, 측정할 수 없는 무형의 감정이기에 우리는 조금 더, 조금 더 많은 애정과 사랑을 바라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보편적 관점이 아닌, 원인이라는 상대적 관점에서 우리는 특정 상황에서 더 많은 애정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 특정 상황이 바로 안정감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는다. 가장 사랑과 애정이 필요한 순간을 떠올려보자. 언제인가? 외롭고 슬플 때인가? 그렇지 않다면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할 때인가? 두 상황 모두 사랑과 애정의 감정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외롭고 슬플 때와 기쁘고 행복할 때 필요로 하는 애정의 감정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상황의 유일한 공통점은 바로 안정이다. 외롭고, 지치고, 힘이 들 때, 그리고 슬플 때. 내 곁에 함께 있어주는 누군가에게 우리는 안정감을 느낀다. 타인으로부터 위로를 얻고 지친 나의 감정을 달래며 더 깊은 정을 교류할 것이다.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기쁘고 행복한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누군가가 존재하기에 나는 그 상황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성과를 내거나 축복받을 일이 생겼을 때, 나의 상황을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과연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기쁘고 행복함의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아쉽고 속상한 감정에 먼저 사로잡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의 기쁨과 나의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우리는 더 큰 행복을 손에 쥘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안정감이다.
 최근 들어 지치고 힘이 들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적이 꽤 많아졌다. 혼자 살고 있는 학생 신분이기에 몸이 아플 때 방에 혼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우울해지곤 한다. 그런 경험이 다들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너무나도 힘든 상황을 마주하였을 때, 나의 상황을 내가 직접 전달하지 않는 한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한 경험. 이 자각은 사람을 무척이나 괴롭게 만든다. 아무도 나의 상황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누군가는 꽤나 큰 공포감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상황과 일상을 함께 공유하고 살아가는 것.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는 편안하고 포근한 감정이자 목표이다. 이러한 감정과 목표의 주(主)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안정감이다. 그렇기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현 상황이 불안정하거나 온전하지 못할 때 더 큰 애정과 사랑을 열망할 것이다. 누군가의 애정과 사랑을 통해 자신의 불안정함과 불안함을 해소하기를 원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 시선으로 관찰하고자 한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정보 또한 타인에게 쉽게 얻을 수 있다. 물론, 그 상황에서 위로가 섞인다면, 이는 나에게 안정감을 주고자 꽤나 달콤하고 사실적이지 않은 말이나 표현이 많이 섞여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때때로 이를 필요로 한다. 위로받고 싶다거나,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감정. 이는 사실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느끼고, 필요한 당연한 감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감정을 때때로 부끄러워하고, 옳지 못한 것이라고 여겨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위로받고 싶어 하는 감정을 숨기곤 한다.
 MBTI에 관한 담론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는 요즘 상황에서 위로 혹은 공감을 바라는 것은 꽤나 유치하고, 어린아이 같다는 이야기들이 종종 들려온다. 나 역시도 F(감정)가 아닌 T(이성)이기에 무조건 공감만을 바라거나 필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MBTI 담론이 화제가 됨에 따라 누군가의 공감이나 위로를 바라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야 할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현재 사회의 사회적 분위기이자 흐름이다. 이성과 감정. 모두 중요한 것이기에 무엇이 더 낫느냐를 정의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F와 T에 대한 흑백논리적 관점이 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에 따라 누군가에게 공감이나 위로를 바라는 행위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 된다면, 그때는 정말 우리 사회가 너무나도 개인주의적으로 흘러간 것이 아닐까.
 우리는 사람이기에 누구나 안정을 찾고 싶어 한다.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애정과 사랑을 받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립하고 강화한다. 비로소 안정감을 찾고, 그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자신이 받은 긍정적 관점들을 타인에게 전한다. 이렇듯 애정과 사랑은 순환적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정을 준 그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닌, 순환의 굴레를 이루며 언젠가는 나에게 다시 되돌아오게 된다. 더 많은 애정과 사랑을 원할 때, 그때 흘러오는 사랑과 애정은 새로운 것이 아닌, 내가 예전에 한 번 받은 적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필요로 할 때 받은 애정과 사랑은 내가 받은 경험이 있든 없든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달콤하고 평화로울 것이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며, 그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많은 이가 행복하길 바란다. 넘쳐나는 사랑과 애정의 바다 안에 깊게 빠져 헤엄치기를 바란다. 내가 누군가에게 안정을 줄 수 있다면, 난 나의 애정과 사랑을 언제든지 쏟아부울 준비가 되어있다. 사랑이 넘쳐나는 사회, 그리고 세상. 내가 죽기 전까지 절대 실현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안정감을 누리는 그날을 바라며 글을 마쳐보고자 한다.
 "이런 노래 가사가 있다. '지치고 힘들 땐 내게 기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요즘이기에, 다소 안정을 찾지 못한 나는 나보다 그 누군가가 먼저 안정을 찾길 바라며 오늘도 내가 가진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내어주고자 한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살아가는 방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