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노 Nov 04. 2023

내가 살아가는 방식

愛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방식)

 짧았던 空(고독)의 여정을 끝내고 다시 愛(애정)으로 복귀한 데에는 사실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저 모든 것은 비워져 있다면 채워지기 마련이고, 채워져 있다면 언젠가는 빠지기 마련이다. 물론, 애정이나 사랑은 채워진 이후 사라지는 것이 아닌 스며드는 것이다.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는 것은 동일하나 흡수의 유무에서 차이가 난다는 점은 애정은 다른 어떠한 감정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영화가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은퇴작으로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모았다. 다들 보았을지는 모르겠다만, 며칠 전에 극장에서 관람을 마치고 온 나는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내용이 다소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키워드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 안에 등장하는 애정 또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교류를 많이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뜬금없게 영화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우리가 살면서 많은 부분에서 '애정' 혹은 '사랑'이라는 가장 소중한 감정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空(고독)의 여정을 끝내고 다시 愛(애정)으로 다시 카테고리를 변경한 부분에는 나 스스로가 삶의 목적이 명확해지고, 최근의 자신이 꽤나 만족스러우며, 잘 살고 있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즉, 고독하고 공허한 (空) 상태일 때 답하지 못했던 질문,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이제는 자연스레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비어있던 공간이 메워진 愛(애정)의 범주에서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을 언급한 것은 그다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 이번 여름에 알게 된 한 친구가 있다. 약 한 달 정도 함께 생활하며, 나름 친분을 쌓았다. 서로의 일정이 맞아 얼굴을 보게 된 우리의 첫인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였다. 재미있게도 필자가 친구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는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 거야? 한 번 잘 고민해 봐. 조심히 들어가라."였다. 처음 알게 되었을 당시에는 같은 길을 걸었던 친구이지만,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렇기에 저런 인사들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함께 밥을 먹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에 대해 반응하는 모든 감정적 교류. 사실 넓은 범주에서 본다면, 이 역시도 애정이다. 그 친구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기에 지금 걷고 있는 자신의 길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만두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도 서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넓은 범주에서 본다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부터 그 친구는 자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판단이 있다는 것이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에서 자신의 행태 및 앞날을 관철하고 이에 대한 판단을 어떠한 근거 하에서 결정하는 것. 비록, 자신이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느낄지라도 이러한 시간은 절대 헛된 것이 아니다. 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은 꽃가루의 수정과 착상을 거쳐 꽃봉오리가 형성된 후 꽃잎이 비로소 펼쳐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기 위한 준비 태세의 과정이다. 그렇기에 난 그 친구의 입장을 공감해 주기보다는 "목표를 한 번 정해봐"라는 다소 무뚝뚝한 말과 함께 격려하고 지지해 주었다. 난 그 친구가 나의 친구이기에 반드시 잘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옆에서 봐왔던 것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글을 쓰는 와중에도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말은 오직 하나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렇다면 이어지는 물음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중요한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사람마다 의견에 대한 선호도는 차이가 날 것이다. 각자의 주장이 있겠다만, 필자는 이 물음에 대해 "어떻게"라는 수식어를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주장이다. 어떻게, 즉 어떠한 방법은 방법론적 관점에서 입장의 차이가 다양하게 갈릴 수 있다. 그러나, 방법이라는 것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리기 위한 수단이다. 가장 편한 방법, 가장 빠른 방법. 이러한 예시적 방법들은 보편적 관점에서 시행착오를 여러 번 거쳐 일반적인 경우에 통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은 각자 다르지 않은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크기 또한 다르지 않은가? 그렇기에 사람에게 '어떻게'라는 것은 상당히 추상적인 관념일 수 있다.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결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공은 오로지 '나', 본질적 자신이 주체이다. 타인의 간섭을 받을 권리도 없으며, 누군가를 모방해 살아갈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는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근본적으로 명쾌한 해답을 드러내거나, 찬반을 따진 명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삶을 사는 방식, 그리고 나의 친구가 삶을 사는 방식은 온전히 다를 것이며, 달라왔다. 그렇기에 난 그 친구가 어떻게 삶을 살아가든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 '삶'이라는 꽤나 무거운 주제에 대한 고찰은 자연스레 애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삶의 방식을 존중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애정의 표현 방식과 굉장히 유사하지 않은가? 누군가의 사랑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정하는 것. 그러나, 이는 쉽사리 판단되지 않으며, 때때로는 내 안의 깊은 곳에 남아있어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 또한, 받았음에도 부족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가 받은 애정의 크기나 사실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 이는 애정이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현상과 굉장히 유사하다. 삶의 방식과 애정과 사랑 사이에는 극명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또 한 번 증명된 것이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 "어떻게 살 것인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앞 날을 걱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이는 애정이라는 넓은 범주에 포함되기도 한다.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를 인정한다는 것이며, 이는 그 대상이 사랑하는 방식 혹은 선호하는 것들이나 애정 또한 존중하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정말 많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까지도, 그리고 지금까지 혹은 앞으로도 내가 사랑할 사람들에게 한 마디 전하고 글을 마무리 지어보고자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중요할지도 모른다. 또한,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그만큼 중요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대들은 '어떻게'가 아닌 '만족하며'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너무나도 쉽고 그리고 획일화되어 내게 전해질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길 원하니까. 애정과 사랑이 가득한 그런 풍요로운 삶을 그리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내가 사랑해 왔던 그리고 사랑하는, 앞으로도 사랑할 그대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 것이다. 그럴 것이며, 그래야 한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이가 그대들의 애정과 사랑의 방식,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이며, 격려하고 사랑할 것이다. 의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닌 '만족하며' 그리고 '자신 있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고찰을 단 한번쯤은 하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홀로 서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