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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노 Apr 09. 2024

운명론, 그리고 바람이 되어

:re (순풍)

 우리는 태어난 그날부터 무엇인가를 끊고, 무엇인가와 연결되었다. 어머니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던 탯줄이 제거되고, 배꼽이라는 새로운 매듭과 함께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름이 생긴다. 욕구에 무엇보다 충실한 갓난아이 시절을 지나 보낸 후 처음으로 누군가를 인지할 수 있을 때, 그때 내 앞에 서있는 사람들은 부모 혹은 형제일 것이다. 많은 사람은 말한다. 삶이라는 것은 B(Birth)와 D(Death) 사이 C (Choice)라고. 그러나, 이러한 말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우리는 운명이라는 축복 아래 A (Accident), 즉, 우연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 누군가는 부유한 국가의 부유한 집안에서, 누군가는 가난한 국가의 빈곤한 집안에서 태어난다. 의도하지 않은 우연 (A)으로 시작된 탄생 (B)이 선택 (C)이라는 인생을 통해 결국은 죽음 (D)이라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많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한다. 학교나 직업 등 자신이 속할 작은 사회를 선정하거나 친구관계의 맺고 끊음 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태어난 순간 정해지는 것, 성별이나 출생 지역 등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우연적인 상황들은 삶을 영유해 가며 행하는 선택으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수성가를 이룬다거나, 태어난 국가를 떠나 해외로 이민을 간다거나. 한 사람이 살아가며 만드는 모든 일들은 정답이 없기에 그 어떠한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우리가 태어나며 죽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어쩌면 운명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결말이 난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소설과 같은 어떠한 이야기는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지만, 독자들은 그 결말에 대해 유추하거나 가설을 던질 뿐 정확한 결말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결말이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거나, 예상하지 못한 최후를 맞이할 경우 그 이야기의 작가는 많은 질타를 받곤 한다. 그 이야기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음이 분명한데도.

 우리의 삶 또한 이것과 같다면, 솔직히 조금은 무서울 것 같다. 나의 자유 의지로 행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며,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최선의 선택이 어쩌면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답이었다고 한다면 분명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더 잘 살고자 노력하는 이유는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볼 수 없는 미래를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행위이다. 자식에게 무엇인가를 물려주고자 하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고자 잠을 줄여가며 시간을 쏟는 사람들도 허다할 것이다. 그렇기에 앞에서 언급한 운명론이라는 것은 허무맹랑한 헛소리에 가깝다. '노력하는 운명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정해져 있는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처럼 정해져 있는 삶을 살아가는,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말을 한 것은 내 노력에 비해 더 많은 행복을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 B와 D 사이의 C'라는 말보다는 'A을 시작으로 한 B와 C 이후의 필연적인 D'의 입장에 훨씬 가깝다. 출생, 선택, 죽음은 우리가 처음 이 땅에 태어나고 모든 것이 자연스레 정해진 '우연'을 절대 거스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좋은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 좋은 선택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난 삶을 살아오며 좋은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다. 이게 만약 정해진 레퍼토리이자 이야기이며 운명이라면, 난 그런 운명을 내게 선사해 준 사람에게 충분히 감사해야 한다. 반대로 운명 따위는 없고, 우연히 이 땅 위에 태어난 내가 살아오며 해온 선택들로 인한 보상이 좋은 인간관계라면 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야 함이 마땅하다.

 태어나고 죽는 것. 탯줄을 끊고 시작한 인생의 마지막 또한 자신의 숨이 끊기는 것. 끊고 연결하고를 반복하는 인간의 삶의 형태는 직선이 모양이 아닌 고리 형태의 원형일 것이다. 원형은 직선과 달리 끝과 끝을 찾을 수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 삶을 마감한다고 하더라도,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기리는 것이 아닐까.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 탯줄을 잘라내고 배꼽을 만들어 첫 매듭을 지은 순간. 그 순간을 시작으로 죽어서까지 절대 풀리지 않는 고리를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만약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원형의 순환과 연결고리 그 자체가 운명이지 않을까.

 삶의 '운명론'이라는 근거 없이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간 것은 어찌 보면 불안정한 나 자신에게 전하는 글이 아니었을까 싶다. 두렵고, 불안하기에 노력하기보다는 인생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망상으로 회피하려 했던 자신에 대한 쓴소리일 수도 있다. 반대로, 자신의 선택과 노력에 보상받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그 선택과 노력의 대가가 어떠한 형태로든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전하는 메시지 일 수도 있다. 나의 가설을 통한 이 글은 어떠한 형태로든 전달될 수 있다. 반대로, 어떤 형태가 되어도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운명이든, 운명이 아니든. 정해진 이야기의 주인공이든,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의 조연이든 상관없이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운명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오로지 '나' 하나뿐이기에. 나라는 사람의 삶을 살아온 누군가의 예시가 없기 때문에 나의 삶은 곧 정답이자 결말이고 운명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한 운명론이 실제 했다면, 내가 지금 글을 쓰는 것조차 운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난 나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며 누군가에게 전달하라는 계시를 받은 것이 될 터 어니.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은 없겠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고 떠오른 무언가를 바탕으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누군가의 대변인이 되어주고자 한다. 이것은 내가 정한 나의 운명이고 거스를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내가 써 내려가는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결론. 그리고 나만의 운명. 종착지에는 어떤 결말이 기다릴 수 있을지는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 간 나조차 알 수 없지만, 그 결말이 나뿐만이 아닌 모두에게 은은하고 따스한 바람이 될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나를 끊어내어 새로운 나와 연결 지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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