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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한강 Oct 23. 2024

"덥다 덥다 하면 더 덥다"

우리 할머니의 친정은 벼농사를 지을 논이 그리 많지 않은 동네인 지금의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이다. 양평군 서종면 무드리(수입리)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있는 자그마한 동네이다. 논은 물론 농사지을 땅이 크지 않은 작은 동네라 쌀이 풍족할 리 없었다. 그래서 북한강 옆에 붙어 있고 계곡이 깊어 논과 밭이 섞여 있는 데다 농업용수로 쓰이는 물을 끌어 쓰기 수월한 개울물까지 끼고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내 고향 문호리로 시집을 오시는 처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나의 할머니도 그중에 한 분이셨고 작은할머니(종조모)와 이모할머니도 그런 연유로 문호리 총각들과 연을 맺으셨다.


밭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던 나의 외갓집은 수시로 들락거리던 곳이기에 방학 때나 돼야 찾아가는 외할머니 사랑의 대명사, '외갓집' 판타지는 꿈도 꿔보지 못하고 유년 시절을 보냈다. 며느리에게 살림을 넘기신 할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귀한(?) 손주의 손을 잡고 친정 나들이를 하시곤 했다. 매년 곡식이나 현금으로 세를 받아 가는 나룻배를 타고 북한강을 건너서 지금은 춘천 가는 자전거길이 아름답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 이십 리를 조금 못되게 걸어야 하는 길이라 아직 국민학교도 가지 못한 어린애한테는 적잖이 먼 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당시에도 완행버스가 다니던 길이었지만 어쩌다 다니는 버스를 타는 행운은 없었다. 칭얼대는 손주를 잠깐 업어주시기도 하고 어르고 달래며 애들 걸음으로는 두 시간을 훌쩍 넘겼을 길을 나서시곤 했다. 내게는 그렇게 나의 외갓집이 아닌 아버지 외갓집에 대한 추억이 생겼다.

두 살이나 어린 데다 당시로는 눈에 띄게 키까지 크신 연하남을 남편으로 맞으신 우리 복 많으신 할머니가 혼사 전에 있었던 할아버지와 얽힌 일화를 들려주신 적이 있다.

정혼은 했지만 아직 혼례를 치르기 전이었던 예비 사위, 할아버지가 처가를 방문하실 일이 있었다. 예의 그 길을 걸어 도착하신 할아버지는 선뜻 대문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시고 인기척만 내셨는데 집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다른 식구들은 할아버지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할머니만 인기척을 느끼고 미닫이문에 작게 붙은 유리로 내다보니 할아버지셨다고 했다. 아직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예비 신랑인지라 부끄러운 마음에 아는 척도 못하고 보고 있으려니 두어 번  더  부르시던 할아버지가 휙 돌아서 가시는 바람에 부랴부랴 당신의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사위를 맞아 드렸다며 '느 할아버지가 그렇게 숫기가 없다'고 할아버지를 디스하시곤 했다. 할머니가 그러실 때마다 할아버지는 별 말씀 없이 웃기만 하셨다. 그럴 때면 나는 '그때 가만히 계셨으면 할아버지가 바로 집으로 돌아가셔서 파혼하는 바람에 나는 태어나지도 못할 뻔했다'며 할머니 옆에서 실없는 소리를 하곤 했다.


위의 일화에서 처럼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말수가 적으셨던 탓에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보이셨지만 속은 다정한 분이셨다. 시쳇말로 '츤데레' 그 자체셨다. 말씀이 적으셔서 살가운 얘기를 하신 기억은 별로 없지만 땔나무 하러 산에 갔다가 돌아 오실 때면 철 따라 머루며 다래, 개암에 산밤 따위를 내게 슬며시 내미시곤 했다. 아버지보다 나를 더 많이 업어 주신 분도 할아버지셨다. 장작을 팰 떄 필요한 고급 기술인 도끼질이며 여전히 유용한 톱질이며 칼갈기 따위를 가르쳐 주신 분도 할아버지셨다. 혼자 힘으로 동생들을 모두 시집, 장가 보내셨고 아들을 서울로 유학을 보내셨다. 그 아들은 훗날 자식들 공부를 위해 서울로 이사를 했고 은퇴하실 때까지 주말부부로 사셨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아들을 유학보내신 할아버지 덕분에 손주인 나는 후에 그 동네에서는 몇 안되는 대학생이 되었다.


이 연상연하 커플은 팔순을 훨씬 넘기실 때까지 함께 사시다가 한 달 간격으로 돌아가셨다. 그 이후로 부부는 한날 한시에 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다섯 살이나 어린 마누라 한테 감히 발설한 적은 없다. '덥다 덥다하면 더 덥다'는 어록을 남기셔서 더운 여름만 되면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더욱 새롭다.       


올 여름은 무지 더웠다. 안 덥다를 열나 외쳤지만 딱히 시원해지지는 않았던 탓에 에어컨 신세를 하루 저녁 질 수 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간다.


<참조>

화도읍:읍으로 승격되기 전에 화도면(和道面)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상도면(上道面)과 하도면(下道面)을 합면하면서 이름에 합할 화(和)를 넣어 화도면으로 부르게 되었다. 상도면(上道面)과 하도면(下道面)이란 이름은 서울에서 춘천 가는 길의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나누어 부르던 데서 유래하였다.

도끼질이 고급 기술인 이유: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제 발등을 실제로 찍는 불상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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