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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 잡문집

비움의 힘

심플 라이프, 단순한 삶의 기쁨

by 깡미

몇 해 전, 지방 소도시에서 서울로 이사하면서 서울 어디든 발만 붙일 수 있다면 눈앞에 매력적인 삶이 펼쳐질 것 같은 막연한 동경에 부풀었다.


그러나 대체로 그렇듯 하늘은 무심한 편이었다. 우리 부부가 가지고 있는 총알로 신축 아파트는 언감생심 어림도 없었고, 평수도 줄여 올 수밖에 없었다. 늘어난 것이라곤 매달 통장에서 스치듯 빠져나갈 전세대출 이자와 눈 밑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 시골쥐가 서울쥐 행세하는 현실은 너무나 잔혹하고도 무자비했다.


7톤에 달하는 이삿짐을 26평에 풀고 나니 고단한 이 한 몸 편히 누일 곳이 마땅치 않아 못내 마뜩잖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오월이와 유월이는 미취학 아동이었고, 나는 장난감이나 책을 사도 남들이 다 산다는 '국민 아이템'을 빠짐없이 골라 거실에 좌라락 하고 늘어놓기 바빴다. 기린 미끄럼틀부터 파란 토끼 전집까지. 이 구역의 인간 테트리스는 나였다.




"아, 이게 아닌데!"


남들이 다 하는 무언가를 동경하고 따라 하려고 물건을 채웠던 가짜 만족감과, 코로나로 외출이 어려워 집콕하는 나날들이 콜라보되면서 내 안에 시궁창 시너지라는 게 폭발해 버렸다. 조금만 더 집이 넓었으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텐데 하는 끝끝내 타협이 안 되는 어떤 지점에서 매일매일 울고 싶은 마음을 눈에 붙들어 매었다.


그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 어느 시점에는, 더 이상 공간을 채워 넣으며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비워보기로 했다. 물건도, 마음도, 불안도.




필요한 것이 생기면 오래 쓸 물건을 고르고, 중고품이 있다면 새것 대신 중고로 대체했다. 물건은 적게 사고 음식은 가볍게 먹었다. 또, 이주민 선교를 돕는 교회의 바자회에는 깨끗하고 충분히 입을만한 옷들을 모아 나누었다. 아직도 유월이는 제 형과 그의 친구들이 입었던 옷과 신발을 물려 입는다. 비움과 채움의 넉넉함과 즐거움을 배운 아이는 물려받은 것들을 제법 좋아하고 애착을 가진다. 그렇게 옛 물건과 새 물건의 공존이 어우러진 집은 한결 절제되었고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비움, 채움, 나눔, 즐거움, 넉넉함.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생각처럼 인생은 급작스럽게 불행해지지 않았다.

어지러웠던 것들을 비워내고 다시 채워가면서 금이 갔던 내 마음의 빈틈이 서서히 메워지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아주 충만하게. 자연스럽게 불안했던 마음에게 내어줄 자리도 사라져 갔다. 비움은 남기고 싶을 만큼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똑바로 알려주었다.


이제는 주기적으로(주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과 부엌의 찬장, 신발장을 열고 넓게 보고, 위에서 보고, 여러 각도에서 보고, 한발 물러나서도 본다. 그 지난 계절 속에 내가 있고, 미처 보내지 못한 미련이 여전히 남아있다. 버릴지, 남길지 고민하는 시간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의식이 되었다. 비워야 들어올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이게 바로 내가 행복을 대하는 방식이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것의 대부분을 가볍게 건드려야 한다.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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