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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미 Nov 23. 2024

초4의 연애 (1)

"엄마, 나 할 말이 있어."


아이의 양쪽 볼이 씰룩거리다 못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걸 보니 뭔가 대단한 말이 시작될 조짐이었다.

 

"나 여자친구 생겼어."


'누굴까? 어느 집 딸래미지? 어디 사는데? 그 집 엄마 아빠는 뭐 하시지?'


욕망의 민낯을 드러낸 애미의 선 넘는 속물근성은 어디 가질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자. 둥둥 떠다니는 생각일랑 고이 접어두고 호들갑스러운 축하라도, 연애의 참견이라도,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어쩐지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11월 11일 빼빼로데이를 기점으로 아이의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발에만 땀구멍이 있는 건지 모성애로도 극복할 수 없는 발냄새와 사춘기 정수리 냄새로 그득하던 아이의 방에서 뽀송뽀송한 페브리즈향이 나기 시작했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감아댄다. 아침마다 애미 목의 확성기 버튼을 눌러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나는 미라클 모닝을 열고 다. 기적이다. 거울앞을 떠날 줄 모르는 머리숱부자 김무스씨는 눈곱까지 마저 떼고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등교를 한다.


참나,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별빛이 내린다. 샤랄라라 랄라라



내 아이들이 다정한 시선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다정한 관찰자'가 되리라 마음먹은 지 딱 삼일째다. 하지만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겠지. 손에 붙들고 놓지 못하는 저 놈의 핸드폰을 몰래 열어 보리라. 실로 다정하지 못한 방법이지만 비밀번호 패턴 알아내는 것쯤은 귤 까먹듯 쉬운 일이니 문제 없다.


고요한 밤, 흡사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업이 시작 되었다. 조심스럽게 오월이의 방 문 앞에 섰다. 가끔씩 들려오는 규칙적인 아이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충전기에 놓인 핸드폰을 슬쩍 가져오는 것까지 성공. 손 끝으로 잠금화면을 슬쩍 넘겨본다. 그럼 그렇지. 이 패턴일 줄 알았다 이 녀석아. 자 이제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보자. 네모 모양의 '메시지' 탭을 누르는 순간, 실패의 신호를 알리는 진동이 손끝을 울린다. 지문인증을 하란다.


참나, 찜찜한 여운을 남긴 작전은 실패다.


탐정모드가 실패로 돌아가자 애미의 기본값은 다시 관찰자로 세팅 되었다. 첫사랑의 풋내를 오롯이 느끼는 오월이와 대조적으로, 발효되어 쿰쿰하게 썩은내가 날지도 모르는 애미의 사심을 담은 말일랑 꾹꾹 눌러 담아 놓기로 한다. 관찰자의 마음은 계속 비밀이니까. 무엇보다 오월이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아니까.





며칠 지나지 않아 오월이 뜬금없는 질문을 해왔다. 

"엄마, 사람의 평균 심박수는 몇이야?"

"어..보통 80에서 100정도 하던데. 왜?"

평소에도 엉뚱한 상상을 즐겨하고 질문을 던지는 아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심드렁하게 대답해주었건만.



"내 여자친구는 나랑 문자 연락할 때 심박수가 120이 넘는대."



요즘 플러팅은 이런건가. 치명적이다. 순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설렘을 심박수로 분석하는 초4는 무엇을 증명해내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심박수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그냥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겠지. 오월이는 내 반응을 살피더니 다시 제 방에 들어갔다. 아마도 또 심박수를 잴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사랑은 숫자로 잴 수 있는게 아니라는걸. 아이의 세상에 처음 핀 설렘의 싹을 지켜보는건 생각보다 흥미진진한 일이다. 내심 아이의 다음 질문을 기대하며 연애사를 계속 들어주리라 생각해본다. 덩그러니 앉은자리에 예고 없는 소나기가 내리더라도 말이다.








*사진출처 : by stux, JillWellington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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