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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샤랄라 Apr 01. 2024

울 62%, 나일론 34%, 캐시미어 4%

교육에세이

니트의 보들보들한 감촉이 나를 감싼다. 살에 입어도 어디하나 껄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편안하다. 보통은 어느 한 구석 따끔따끔 거리는 곳이 있을 법도 한데, 이 옷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일교차가 큰 요즘, 여러 겹을 입기에는 귀찮고 그럴 때 위에 가볍게 걸치면 금새 나의 체온으로 몸을 데워주기에 외부의 따스한 햇살과 달리 아직은 냉기가 도는 실내에서 입기 좋다. 옷의 감촉과 보온성이 좋아서 옷의 성분이 적힌 택을 꼼꼼하게 살펴 본다. 이 니트는 울 62%, 나일론 34% 그리고 캐시미어 4%가 혼합된 조직이란다. 각각의 성분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섬유를 적절히 배합하여 옷을 만든단다. 울의 함량이 높은 편이다.


당시 이 옷을 구입할 때에 브랜드가 가진 이미지를 생각하며 옷을 만져보고 샀던 기억이다. 까끌함이 없는 트 소재를 원했기에 입고 있는 동안 만족도가 높았다. 하지만 내가 옷을 거칠게 입는건지 니트 특유의 보풀이 서서히 일기 시작하면서 이건 보풀제거기를 써도 깔끔해지지가 않는다. 섬유 조직이 부드러운 만큼, 아무래도 이 옷은 일상의 부대낌을 견뎌 내기가 여간 힘든게 아닌가 보다.


보풀이 일어난 옷을 보며, 이토록 보드라우면서도 보온성을 갖춤과 동시에 보풀이 생기지 않도록 조직을 배합하려면 각각의 성분이 몇 퍼센트로 배합이 되면 좋을까 나도 모르게 상념에 잠긴다. 이 옷이 사람이라면, 인간이 인간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공감과 사랑에다가 거친 세상의 역경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얼마 만큼의 대담함과 용기, 진취성이 배합이 되면 좋을까 고민해 본다. 그리고 또 나는 내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까지 생각이 번진다.


아이가 보통 하나, 둘인 요즘 엄마, 아빠에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아이의 수족이 되어주는 집들이 많다. 아이가 스스로 해야 할 일들까지 부모가 앞서서 챙겨주니, 아이는 스스로 챙길 줄을 모른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과목별로 선생님이 알아서 챙겨주니,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해가면 공부는 그것으로 끝이다. 그때그때 아이가 원하는 욕구는 갓난 아이가 배고프다고, 기저귀 갈아 달라고 울면 채워지듯 조금의 지체와 지연없이 채워진다. 아기였을 때에는 그것이 당연한 부모의 의무였지만,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이제는 아이가 스스로 해낼 수 있음에도 양육자는 앞서서 아이의 모든 것을 마련하고 준비해 놓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를 위한 일이고, 또 아이를 위하는 엄마의 모든 희생이 당연하다 여겼다. 삶은 더 편리하고 안락해졌지만, 어쩐 일인지 아이들은 여전히 챙길 것이 많아 보인다. 주말 오전, 선생님과 함께 박물관을 탐험하는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개별적으로 등록하여 팀이 꾸려진다. 딸 아이의 팀에 형제가 등록하여 함께 박물관을 체험하는 팀이 되었나 보다. 본격적인 체험에 앞서서 간단히 프로그램이 어떻게 진행될 예정인지 프리핑이 이어졌다. 실내가 다소 더우니 옷을 가볍게 입어 달라고 진행자가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 팀이 될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입고 온 후드티를 벗고자 한다. 들고 있던 물통을 엄마에게 주면서 '엄마 때문에'라고 온갖 짜증과 불평이 가득한 말투로 투덜투덜 대며 옷을 벗는다. 엄마는 아이 앞에서 엄마가 아닌 '집사' 느낌이었다. 근거리에 있던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으니, 당사자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싶다. 아이를 위해 엄마도 주말 아침부터 바삐 움직였을텐데, 정작 아이는 그 고마움을 모른다.


그렇게 아이들은 점점 더 온실 속의 화초처럼 큰다. 과도한 부담과 도전적인 과제가 주어지면 만세를 부르고, 나자빠진다. 혹여나 내 아이가 잘 다니던 학원을 그만 둘까 엄마들은 전전긍긍이다. 공부하는 모양새를 보자니 영 교육비가 아까워서 정리할까 싶다가도 막상 아이 입에서 학원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나오면 가슴이 철렁하다. 아이의 깜냥이 보여서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조금만 박차를 가하면 실력이 오를 것 같은데, 문제를 안고 끙끙대는 아이의 모습을 보자니 엄마 마음이 더 약해져서 아이에게 포기를 종용한다. 습관처럼 아이를 학원에 보내 놓고, 막상 중학생이 되어 자유학기제가 끝나 시험을 쳤는데 성적이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하면 억장이 무너지며 그때부터 가성비를 따진다. 쥐잡듯이 아이를 잡는다.


가랑비에 옷젖듯이 매일매일의 최선이 모여서 실력이 쌓이고 공부습관이 쌓여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교육이고, 그래서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꼭 붙는 것인데 오늘 우리아이가 뭐라도 하고 있으면 그것에 만족하고 문제없이 일상이 굴러가는 듯 나의 안위에 흐믓해한다. 일부러 문제를 찾아서 들쑤시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아이에게 진심이 담긴 관심을 가지고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함께 '깨어있음'으로 하나라도 더 배워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재미를 붙여주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인데, 어느 덧 공부는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짐이 되었고, 시험을 위한 도구로만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닌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돈으로 다 맡긴다고 될 수 없는 부모의 역할이 분명히 존재한다. 국,영,수라는 과목의 비중이 커져서 모든 교육이 국,영,수로 통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분명 학습 그 이상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하나의 문제를 더 맞추고 덜 맞추고 보다는 배운 것을 나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지적 영역의 확장이 주는 즐거움도 느껴보고, 문제가 풀리지 않아 다소 괴롭더라도 그 시간을 견뎌내며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키워 보고, 반복되는 실수를 자각하며 다음 번에는 이런 실수를 줄여 봐야 겠다고 반성도 해보는 피,땀,눈물의 시간이 국,영,수라는 과목 안에 너무 무분별하게 가려져 있을 뿐이다. 그 장막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가며 그 안에 녹아든 진짜 공부를 깨칠 수 있도록 우리는 날마다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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