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의 시작은 해발 1500m 피레네 산맥을 넘음으로 시작되는데 설악산이 해발 1708m라는 걸 생각하면 오늘 넘을 산은 결코 낮은 산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어제 같은 숙소에 묵었던 폴이 본인도 등산스틱이 필요할 것 같다면서 아침에 같이 이동하자고 이야기했었다. 다행히 순례자 사무실 앞에 있는 등산용품가게는 8시부터 문을 열었고 여러 가지 물품들을 팔았지만 나는 쇼핑을 하더라도 필요한 것만 보고 나오는 사람이기에 스틱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았다. 스틱 한쪽 당 10유로 총 20유로라는 말에 등산 경험이 없던 나에게 스틱은 사실 생소한 물건이고 과연 이것이 필요할까?를 생각했었다.
5분 정도를 고민하다가 필요 없어지면 필요한 사람 주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샀지만 결국 산티아고 끝나는 날까지 잘 사용했었다. 오히려 안 샀으면 어쩔 뻔한적들이 많기도 했었다.
발걸음이 빠른 폴이 먼저 가고 운또까지 이동하는 3km 구간에서 만난 외국인 제이미와 30분을 같이 걸었다.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서 길을 걸어가는 동안 단어를 생각하느라 너무 힘들고 처음 순례길을 걸을 때 혼자 걷고 싶어서 풍경 사진 찍는척하며 그를 앞으로 먼저 보냈는데 30분 뒤 벌써 친구들을 사귄 지 나에게 그들을 소개해주었다. 그녀들의 이름은 알레스, 블로 제이미까지 셋이 전부 미국인이었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에 체력이 부족해 매초 매분마다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세명은 지친 여력이 하나도 안보였었다. 그래서 내가 쉬게 되면 그들도 발걸음을 멈추게 되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10분 정도 쉰다고 하고 그들을 먼저 가게 두었다.
첫 마을이었던 오리손까지 8km밖에 안되지만 이 거리를 혼자 3시간 동안 걸었다. 평균 사람이 6km를 1시간에 걷는다고 하면 터무니없는 속도로 걸어 올라온 건데.. 어쩌겠나 나는 너무 힘들었고 배고팠었다. 심지어 물병도 들고 오지 않아서 마실 물은 없었고 결국 외국인들에게 물을 한모금씩 얻어 먹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도 한두번이라 눈치를 보며 다닐 수 밖에 없었는데 한 외국인이 350ml짜리 물병을 건내주며 이걸 가지고 다니라고 주기도 하였다.
그날 내 일정은 오리손 산장을 지나 론세바예스까지 쉬지 않고 가야 했는데 그날따라 비가 소나기처럼 굵게 안 오지만 미스트처럼 흩날리고 해발고도가 높아지면서 점점 추워지고 있었는데 그때 눈 앞에 나타난 바는 안식처와 다름없었다. 오리손에는 알베르게와 식당을 같이 운영하는 시설이 하나밖에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여기서 먹고 자고 쉬고 가는 곳이었다.
25.6km 일정 중 고작 8km밖에 오지 않았고 무언가를 먹었어야 했는데 나는 고작 제로 콜라 한잔을 마셨었다. 순례길에서 그렇게 콜라를 찾는다던데 왜 마시는지 아는 순간이었다. 한 모금 들이키니 3시간 동안 걸으며 빠져나갔던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는데 당수치가 확 높아지니 엔도르핀이 돌았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안 먹어도 끝까지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참 나라는 사람은 미련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바를 빠져나와 17.6km를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고 계속 오르막을 걷느라 체온이 높아진 나는 이런 산행이 처음이고 덥고 습함을 이기지 못하고 비옷을 벗고 반팔로 비를 맞으면서 걸었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이런 행동이 나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줄 줄은 몰랐다.
여기서부터 론세바예스까지 풍경 사진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비를 맞으면서 올라오느라 높았던 체온은 급격히 낮아져 순식간에 저체온증이 왔고 수년간 운동을 제대로 해오지 않았던 내 몸뚱이와 다리는 한계에 다 달았으며 이틀 굶은 내 빈 속은 더 이상 에너지를 낼 수 없었고 물병이 없어 수분보충을 하지 못했던 내 목은 탈수가 왔었다. 탈수과 공황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뼈져리게 느끼었다.
안개 낀 도로 한쪽 구석에 앉아 내가 선택한 모든 것들에 관해서 후회했고 이를 해결해 보려고 핸드폰을 켰지만 여기는 카카오택시도 없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내 위치를 전송해 줄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가면서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았지만 미련한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 못했었다.
5분 걷고 10분 쉬고 이걸 1시간 동안 반복했었다. 결국은 까친연 단톡방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피레네 산맥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것 같다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이야기했었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관해 미숙했고 그것이 어려웠었다. 그래서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나 스스로의 중도포기를 의미하기도 했었다. 바로 까친연 오픈 톡방 5,6월 방장님이 답변을 주셨다. 내가 왓츠앱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것 같이 결국 112를 부르라고 권유해 주셨지만 마지막 작게 남은 내 얄팍한 자존심은 그것만큼은 안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차들마다 론세스바예스까지 태워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고 거절당하고 있었다.
핸드폰에 112를 찍고 포기하려는 순간 한 명의 여성분이 괜찮다고 말하는 나를 보고 "무슨 소리냐"고 말하며 곧바로 본인의 우비를 벗어 체온을 유지하라며 덮어주고 도와줄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명씩 모이더니 총 8명의 외국인들이 나를 둘러싸고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본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서로 이야기하며 있는 신기한 상황이 벌어졌었다. 하지만 나는 그 광경이 너무 부끄러웠다. 다들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심지어 많이 어린 친구도 있었다. '나는 왜 이것조차 해내지 못하는 거지', '나는 정말 나약한 사람이구나'를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괜찮아? 몸 상태가 지금 어떤 것 같아?"
"내가 가방을 들어줄게"
"이 담요를 덮어, 제대로 덮어 너는 체온유지가 지금 필요해"
여러 명의 사람들이 나를 향해 격려와 도움을 주고 있는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었다. 나는 영어가 정말 미숙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그들이 말하는 언어가 한국어로 말하듯이 또렷하게 들렸었다. 아마도 그들의 표정과 진심으로 걱정하는 행동들이 그것들을 말해주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들이 건네주는 호의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우비를 빌려준 여성분, 담요를 건네준 가족, 내 가방을 들어주려고 했던 가족들, 나를 위해 고민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며 그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가방은 8kg이 넘어가기에 내가 들 수 있다며 말하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었다.
"걸을 수 있겠어? 걷다 보면 체온이 올라갈 거야 우리가 도와줄게 여기 바나나가 있어 에너지를 보충하는데 도움을 줄 거야"
이렇게 말해준 그의 이름은 엘 그는 11명의 자녀를 둔 가장이다. 그는 5번째 아들, 7번째 딸과 함께 까미노 길을 방문했고 이번이 3번째 왔다고 했다. 얼마 안 남은 피레네 꼭대기를 향해 걸어가며 한국의 문화와 지금 한국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 이유가 뭐냐고 물어봤고 나는 스페인하숙이라는 미디어프로그램과 유튜브가 그 이유라고 이야기하며 시시콜콜 이야기를 하며 등산을 시작했다.
오늘의 목적지 론세스바예스까지 이동하면서 선두로 엘 두 번째 도미닉 세 번째 조지 네 번째 나 이렇게 이동했었다. 나는 이미 정신력이 고갈되었기에 내가 스스로 길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체력도 없어서 선두로 나간다면 일행모두가 뒤쳐질 거라고 생각이 들었기에 마지막으로 걸었다. 불평불만은 일절 하지 않았다 묵묵히 그들 가족 뒤를 조용히 따라갔으며 엘은 아이들 상태와 내 상태를 같이 체크해 주며 내 속도가 느려지면 스트레칭하는 시간을 가지자며 잠시 쉬기도 하고 내가 스스로 난관을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는 모습들이 보였었다. 피레네 정상에 도착해 엘한테 이야기했었다.
"당신은 최고의 아버지이며 가족들끼리 왔는데 이렇게 도와주서 감사하며 같이 껴서 걷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해 줄 뿐 내가 같이 걷는 것에 관해서 아무런 이야기도 안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여행을 망치는 것 같아 너무 미안했고 론세스바예스에 갈 때까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이야기했었다. 엘가족 덕분에 포기하지 않아서 피레네 산의 멋진 경치를 구경했었다.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기 10분 전에 나는 그에게 해당 숙소를 예약했냐고 물어봤는데 그는 "저번에 왔을 때는 자리가 여유로웠다며 괜찮다고" 말하는 거다 속으로는 불안했지만 "저는 초행길이라 혹시 몰라서 예약을 미리 하고 왔다며" 이야기를 하며 숙소에 도착했는데 자리가 없다며 나를 제외한 예약 안 한 모든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또 한 번 큰 죄책감에 휩싸였다. 나를 데려가느라 분명 시간이 지체됐을 테고 론세스바예스는 해당 공립 알베르게를 제외한 다른 숙소는 비싼 걸로 알고 있었다. 근데 자리가 없다고? 분명 200개가 넘어가는 침대를 가지고 있는 곳인데? 체크인 안내를 해주는 직원의 목소리가 안 들렸다.
나는 지속적으로 정말 자리가 없냐며 확인했고 직원은 정말 자리가 없다며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엘의 가족은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했는데 죄책감에 그들에게 어디서 묵냐고 물어보지 못했었다. 내가 가진 침대하나를 양보하고 싶었지만 고작 침대하나라서 의미가 없었다. 숙소를 떠나는 그들의 가족 뒤를 바라보며 정말 많은 감정들이 튀어나왔었다 미안함, 고마움, 죄책감, 나약함 이런 다중 감정들을 한 번에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진 기록을 보니 그들 가족과 5시간을 같이 걸었었다.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순례길에서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며 다짐했다. 아쉬운 게 있다면 그의 번호를 모른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다는 게 너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