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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JI Jun 13. 2024

내면 아이에게 보내는 그림책 <살아간다는 건 말이야>

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 도망만 친 나에게

  

<살아간다는 건 말이야> 크리스티안 보르스틀랍 지음 / 권희정 옮김 / 길벗스쿨


“아주 먼 옛날, 사람들 귀에서 하얗고 긴 선이 자라나기 전에”로 시작하는 이 책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아주 귀엽다. 꿀벌을 그렸을까, 코끼리를 그렸을까, 까만 고양이일까, 이것들은 뭔데 다리만 있는 거지? 갖가지 모습의 그림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야기의 무게감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준다.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말이 많은 그림책이지만 나는 어른에게도 좋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그림책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 보면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게 느끼고, 더 많이 보고 있다. <살아간다는 건 말이야>가 어린이가 읽기엔 조금 난해하거나 어렵지 않을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아이들에게 기억도 나지 않을 먼 훗날, 꼭 필요한 자양분이 될 훌륭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인데, 어른들 역시 스스로 눈으로 읽는 것보다 누군가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귀로 듣고, 그림의 서사를 눈과 마음으로 느끼면 훨씬 더 깊게 느끼게 된다.      


         

아주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걸 일찍이도 가르치는 학교가 약육강식의 세상인 정글, 아마존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친구라고 불리던 아이에게 얻어맞게 된 두 번째 폭행에서 나라는 사람의 근본적인 인간다움이나, 인권 같은 부분들이 많이 박탈당했다. 첫 번째 알지도 못하던 아이들에게 당한 단발성 집단 폭행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훨씬 컸다.     


몇 가지 차이점은 '친구'였다는 점. 청소 시간에 폭행을 다 해 같은 층을 쓰던 '모든 아이가 내가 짐승처럼 얻어맞는 것을 목격'했다는 점. 나는 하지도 않은 말로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 내 탓으로 몰아간 친구가 있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또 이후에 내가 집으로 도피한 뒤에도 당시에 쓰던 메신저로 끝없이 비아냥거리며 '온라인상으로도 공격'을 강행한 점 등이다.     


‘친구’라는 것에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상황은 무척이나 모욕적이었다. 학교를 벗어났음에도 반복된 공격에 나의 정신력은 완전히 피폐해졌다. 살기 위해 ‘학교’라는 곳, ‘친구’라는 것에 켜놓았던 관심의 불빛을 전부 꺼야 했다.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에러가 났다. 몇 번 키를 눌러보고, 마우스도 움직여보는데 꿈쩍도 하지 않아. 그럼, 무엇부터 하는가? 강제 종료. 


내가 방 안으로 파고 들어간 것은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저것 해봤는데 내 힘으론 상황을 반전시킬 수가 없어서 시스템 종료를 했다. “살아간다는 건 살아남는 것이니까, 어떨 때는 아주 조용히 있어야 한다.”     


맞서 싸우는 것은 용기 있는 특정 누군가의 행동이기도 하겠지만, 그 용기란 보통 피해자가 내는 것이 맞는가? 그런 상황에서 용기가 있으려면 얼마나 대범해야 할까? 시간을 되돌려서 40대인 지금의 내 정신으로 그 시간,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다면 그땐 나도 반격을 좀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집에 칩거를 시작한 후 아이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수십 명이 내가 맞는 걸 지켜보면서 아무도 어른(이라기도 그렇긴 하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가지 않았고, 나를 때리는 아이를 말리는 시늉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목격하면 나는 말릴 수 있었을까? 어른들은 학교 폭력이 일어나면 침묵하는 다수에게 죄의식을 물리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위해 나선다는 게 쉽지 않다. 그건 두려움에 얼어버린 또 다른 피해자인 목격자에게만 기대할 행동이어선 안 된다.   

  

목격자가 최초의 신고자가 되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해도 어른도 피해자도 그들을 원망해선 안 된다.     


한참을 얻어맞고 나서야 다른 반에 있던 ‘내 친구’가 달려와서 막아섰다. 나를 일으켜주고 독이 바짝 올라 나를 두들겨 패던 아이를 붙잡았다. 종이 울리고 청소 시간이 끝났다. 나는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청소 시간에 내가 당한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시간처럼 수업이 시작됐다.     


얼굴을 가리고 수업을 듣는데, 눈과 입술이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입안 가득 피 맛이 났다. 꿀꺽꿀꺽 피를 삼키며 참기 힘든 수치심에 온몸이 터질 것 같았다. 같은 반이었으니, 구타 후에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수업 시간에도 도끼눈 하며 멸시하는 그 아이의 시선도 두려웠다. 망신스럽고 치욕스러운 50분이었다.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나도 가방을 들고 나섰다.     


살기 위해 도망쳤다. 그러나 이 도망은 일시적이었다. 내 안에 심어진 또 다른 가해자와 보이지 않는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단 하나,”

그 단 하나, 내가 정말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 

그림책 <살아간다는 건 말이야>가 조용히 내 삶을 응원해 준다. 

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 도망만 친 나에게도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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