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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길거리 미술관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

<2024 MWC 2.26-2.29> 행사가'미래가 먼저다(Future First)'라는 주제로  스페인 Barcelona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앞으로 그려질 미래를 위해 다양한 기술과 산업, 집단, 국가가 단합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관련 Youtube영상을  몇 개 챙겨보다 눈에 '혹'하고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Digital Health Zone에 부스를 차리고 있던' Whispp'이라는 네덜란드 회사가 들고 나온 앱이었습니다. 시작은 수술이나 기타 이유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대중이 모인 장소인데 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이거나 아니면   불, 테러, 총기사고처럼 응급상황 시  작게 말한 목소리를 증폭하고 정교하게 해 주는 설루션이었습니다. 현장 상황을 전달해 주던  리포터가 " 모든 폰에 이 앱이 기본값으로 깔렸으면 좋겠다.'라는 개인적인 언급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 급동 감했고요.



영상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환자분이 녹음을 마쳤고, 이 앱을 통해 자신의 또렷한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된 환자분의 울컥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는 동안  자신을 표현할 수 없어 답답함을 너머 자존감에까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사용자를 감동시키는 앱이 세상에 몇 개나 존재할까요?

디지털에 취약한 40-60대 이상의 여성들을 상대로 유명인의 모습을 AI 기술로 교묘하게 결합해 사기를 치는 불한당들이 설치는 세상입니다.  무방비로 노출된 약한 고리들이 '어~'하다 고꾸라지고요. 아픈 곳, 가려운 곳을 'Whispp'이란 회사가 제대로 해결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좋은 테크기업이 앞으로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싶었고요. 




어느 분야든 꼭대기를 맞보신 분들은 고민합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 어떤 식으로 기여를 할까를 말입니다. 2023.9.15 남미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페르난도 베테로(Fernande Botero 1932.4.19- 2023.9.15)의 사망 소식이 있었습니다. 과장된 인체 비례와 뚱뚱한 모습으로 묘사된 인물 그림으로 유명하지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자기 다운 방식으로 대중에게 다가간 화가이자 조각가입니다. 








예술은
일상의 고됨으로부터
 영혼을 쉴 수 있게 해 준다





그림(왼) <죽마를 탄 광대들>,2007/중앙일보#그림(오)<춤추는 사람들>,1999/아트인포
콜롬비아 , 메데인/경향신문




페르난도 보테로 Fernando Botero)는 1932년 콜롬비아 메데인 출신입니다. 가난했던 집안 사정으로 인해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12살 때 투우사 양성학교를 입 합하며 투우를 배우기도 했지만 결국 그림을 선택합니다. 외딴 지역에 자랐던 보테로는 현대회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후 스페인, 파리, 이탈리아, 멕시코, 뉴욕등을 오가며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고 작품활동을 하게 됩니다. 




동네스타에서 전국구 스타가 되기까지 고민도 참 많았고 시행착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여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을 거쳐 파리에 왔을 때 보테르는 크게 실망합니다. 오히려 마음의 갈등만 심해집니다. 당시 보테르가 유학 가던 해 파리는 피카소와 마티스가 대세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맞지 않았습니다.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스타일의 양식을 과감히 거부하자니 고민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결심을 내리고 이탈리아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이 만들어 낸 인체의 아름다움과 바로크의 찬란한 색채 미술에 매료됩니다. 모사하고 또 모사하고 연구하고 그리고 깨닫습니다. 위대한 예술은 기존을 것을 답습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유학을 마치고 뭐라도 된 것인 양 의기양양하게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미처 소화가 안 된 음식이 체하듯 자기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닌 힘만 잔뜩 들어간 이상한 그림이 나옵니다. 그러다 '지오토'를 통해 공간감을 불어넣고, 멕시코의 벽화거장'디에고 리베라'의 그림으로 통해 거대함을 융합시키기  시작합니다. 평면을 풍성처럼 부풀리는 것은 '지오토'로부터 가져왔습니다. 거대하게 그리는 것은 '디에고 리베라'로부터 가져오고요. 이렇게 해서 보테로는 거대함을 통해 형태, 색채, 구조 등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만들어 갑니다. 일명 딱 보면 알 수 있는  '보테로 스타일'말입니다.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흉측하다.", '비만작가', 그리고 '키치(kitsch:괴상한 것 , 저속한 것)'라는 비평을 줄곧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나름 확신을 가지고 15년의 무명 시절을 버티어 냅니다. 지금은 60여 곳의 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릴 정도로 몸 값 비싼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회화는 20억대가 넘습니다. 간단한 드로잉 작품도 8천-9천만 원이 넘고요. 그의 그림 속 '보테로족'들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걷어 낸 친근하고 재미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 덕분에 누구라도 라틴 아메리카 미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고요.




예술가는 
자신의 영토에 
뿌리를 깊게 내릴 때만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찾는다 하다라도
미술관은
엘리트를 위한 곳이다.
길바닥에 
작품을 설치하면
모든 사람이 감동받을 수 있다.
-피가로지 인터뷰 중-






https://www.youtube.com/watch?v=T1Z6fZU40fM





작가들이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하고 나면 더 이상 나아갈 때가 없어 그 자리에 곰팡이 핍니다. 푸른곰팡이가 피면 사람에게 이롭지만 다른 것들은 해롭지요. 보테로 역시 매너리즘이 찾아옵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소재를 바꿉니다. 특히 1963,64년 조소작품에 전념하는 식으로 말이죠.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에 집을 구해 살았습니다. 그곳은 구리 광산과 청동 주조 공방들이 많은 곳입니다. 또한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요. 지금은 그곳이 보테로의 사망으로 두 명의 거장이 살다 간 독특한 이력을 지닌 마을이 된 셈이네요. 1992년 <Botero Monumental Sculpture>라는 이름으로 파리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에서부터 콩코드 광장까지 31개 조각상이 설치됩니다. 프랑스 출신도 아니고 생존 작가로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전시 공간을 허락해 준 일도 파리시의 전무후무한 일이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w0xKQUoCvsM





이후 스페인 바르셀로나'Raval'이라는 곳에 <CAT,1981> 작품이 설치되며 마약과 매춘으로 암울했던 도시 미관이 예술가의 조각상 하나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도시 재정비 사업이 시작되었고, 이 작품을 보러 관광객들이 찾아오며 바르셀로나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공공미술이 도시정화를 하며 문화의 도시로 탈 바꿈 하게 된 거죠. 보테로는 자신의 재능을 길거리 작품으로 내놓으며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갑니다. 







보테로는 유럽의 미술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림을 습득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y Veazquez 1599.6.6.-1660.8.6),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 1390-1441),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4.15-1519.5.2)등 거장들의 작품을 패러디해 새로운 미술의 흐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거장들의 작품을 패러디한 다는 것은 '존경한다'라는 말과 동의어이기도 합니다. 왼쪽에는 원작자를 오른쪽은 보테로가 패러디한 작품을 감상해 볼 수 있도록 실었습니다. 볼 수 있는 부분들 보시고, 좋은 것들 오감으로 가져가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페르나도 보테르 <모나리자>/조글로






작은 그림 하나에 웬 사람이 그렇게 많던지! 그녀를 보러 가던 날 너도 나도 핸드폰을 치켜들고 플래시를 터트리는 바람에 먼~ 발치에서 까치발 하고 겨우겨우 영접했습니다.  조그마한 액자 안의 갇혀있는 그녀는 전생에 무엇이었기에 구름 떼 같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19세기 루브르 박물관에는 모나리자보다 유명하고 가치 있는 작품들이 넘쳐났습니다.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들어 보셨죠. 이 말은 '모나리자'에 딱 맞는 이야기 일지 모릅니다. 모나리자가 유명해진 이유가 바로 도난 사건이기 때문이죠. 1900년 초 '빈첸초 페루지아'라는 이탈리아 사람이'다빈치가 이탈리아 사람이니 이 그림을 당연히 이탈리아로 가져가야 한다, '라는 주장으로 모나리자를 훔쳐 달아납니다. 다행히 체포되었고 다시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밖에도 모나리자를 훼손하려는 사건이 여럿 일어났습니다. 언론에 노출 빈도가 잦아지며 모나리자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 또한 높아집니다.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작품들도 많아지고요. 





당시에 여자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는 것이 금기시되었습니다.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여자는 성모 마리아와 이브 뿐이었죠. 당시에 초상화는 부를 상징하는 그림이었기 때문에 눈을 마주치지 않고 다른 곳을 보며 우아함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그런 면에서 좀 다르죠. 어떤 전문가들은 다빈치가 여장하고 자화상을 그린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다빈치와 모나리자의 얼굴을 인공지능으로 분석했는데 둘이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습니다. 





눈썹에 대한 의문이 많죠. 그 당시 이마가 넓은 여자가 미인으로 여겨져 눈썹을 밀거나 가늘게 하는 게 유행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려진 이 기법은 한 번에 그림을 코팅하지 않고 일부분을 그리고 코팅하고, 그리고 또 코팅하고 를 반복하여 그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기법은 모나리자의 마지막이 눈썹이었고 마지막으로 코팅한 눈썹이 떨어져 나간 것이라는 의견 또한 있습니다.




다빈치의 '스푸마토기법'은 이탈리아어로 'Sfumato(연기처럼 사라지다)'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름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지는 느낌을 표현했죠. 연기처럼 흐릿하게 표현된 입과 눈 때문에 모나리자는 웃는 듯 보이기도 하고, 우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기에 다빈치의 모나리자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에만 존재한 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분석결과 밑그림은 다빈치가 그리고, 색은 다빈치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보이는 모나리자 그림이 영국 <아일워스 모나리자(Isleworth Mona Lisa)>와 스페인 프라도에 <Mona Lisa>등이 있습니다. 




그림(왼)<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1656/나무위키#그림(오)페르난도 보테르<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1982/Pinterest



바로크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가 애정을 담아 그려낸 다섯 살 공주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입니다. 그가 그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그림들에서 조카를 바라보는 듯한 애정 어린 시선이 느껴집니다. 당시 스페인 왕실은 궁정화가에게 공주의 성장 과정을 그림으로 기록하게 했습니다. 궁정화가였던 벨라스케스는 마르가리타를 아기일 때부터 그녀가 9살이 되고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해까지 여러 차례 그립니다. 





 다섯 살 왕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랑스러웠던 공주의 모습입니다. 쓱쓱 그은 듯한 선 몇 개로 흰색 원피스의 주름을 묘사한 신기에 가까운 붓터치가 돋보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성장하면서 당시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족들의 숙명과도 같았던 주걱턱이 두드러지게 됩니다.  이것은 반복된 근친결혼의 폐해이고요.





벨라스케스는 24세 때 스페인 왕실의 궁정화가로 발탁돼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펠리페 4세와 가족들을 그렸습니다. 펠리페 4세는 오직 벨라스케스에게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할 정도로 신뢰가 두터웠고요. 화가 역시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왕에게 존경을 보냅니다. 둘의 우정은 여느 왕과 궁정화가 사이에서 보기 어려울 만큼 깊었다고 합니다.




공주는 15살 때 외삼촌 레오폴드 1세와 정략 결혼해 네 아이를 낳은 뒤 22세의 나이로 출산 중 사망합니다.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을 담뿍 받았고, 결혼해서 남편과의 사이도 좋았다고 하니 불행한 삶은 아니었을 테지요.  바로크 시대 특유의 과장된 드레스를 5살 아이가 무겁게 걸친  초상화를 보니 연민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왕족은 물론 그들의 시녀들까지 따뜻한 인간애를 담아 그렸던 벨라스케스이기에 그의 초상화 속에서 마르가리타 공주는  여전히 발랄하고 매력적인 모습입니다. 벨라스케스 사후 다른 화가들이 그린 그녀의 초상화에서는 결코 이런 매력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녀의 어릴 적 사랑스러운 모습은 벨라스케스라는 걸출한 거장의 손끝에서 살아나 영원히 세계 미술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림(왼)<Arnolfini e ingrandimento>,1434/www.pinterest.co.kr그림(오) <Arnolfini botero/Black Miners Museum







15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회화로 꼽히는 작품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입니다. 섬세한 표현의 정수를 보여준 이 작품은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걸작으로 손꼽히죠. 침실, 맹세를 하고 있는 듯한 포즈,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꼭 붙잡고 있는 손까지 ,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결혼을 하는 모습일 것이라 유추합니다. 





실제로 그림이 그려진 15세기는 그림에 상징을 넣는 것이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전까지 그려졌던  종교화에서는 물건이나 상황 속에 종교적인 의미를 숨겨뒀었죠.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오면서 화가들은 신이 아닌 현실을 그린 그림에도 나름의 의미를 넣기 시작합니다. 당시 종교화와 세속화를 모두 작업했던 얀 반 에이크도 예외가 아니었죠. 





우리는 아르놀피니가 브루게에서 일하던 이탈리아 상인이라는 정도만 알 수 있습니다. 15세기 초, 브루게는 번성하던 경제도시였습니다.  얀반 에이크가 그림 속에 숨겨 놓은 퍼즐 조각 중 하나는 바로 아르놀피니의 '부유함'입니다.




당시의 침실은 지금처럼 은밀한 개인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방문객을 맞이하는 공간이었죠.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할 수 있는 장소였던 거죠. 그들이 입은 옷을 살펴보면 섬세하고 화려한 모피코트를 입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겨울옷을 입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여인의 배가 불룩한 것을 보고 임신한 것이라 추측하기도 합니다. 확대해서 자세히 보면 손이 옷을 감싸 안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복장이었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비싼 천으로 만든 드레스를 아주 길게 만들어 손으로 부여매고 다녔다네요. 로고 있는 가방 들고 다니는 것처럼 말입니다. 창가 아래쪽에 오렌지가 놓여있습니다. 당시 부뤼헤에서 오렌지는 아주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아마 아르놀피니 부부는 그 지역을 주름잡는 부자였나 봅니다. 그의 섬세한 표현방식은 이들 부부의 부유함을 그려내기에 아주 적합해 보입니다. 






 두 부부는 침실에서 신발을 벗고 있습니다. 남자의 나막신은 남자의 발 옆에 여자의 붉은 신발은 뒤편의 붉은 소파 앞에 있습니다. 유럽사회는 실내에서 신발을 벗는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신성한 공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한 마리 개는 신뢰와 충실함을 상징합니다. 기독교 사회였던 당시에 단 하나의 촛불은 신의 눈을 의미하고요. 지금 이 순간 신의 가호 아래 이루어진 성스러운 서약이라는 의미입니다. 샹들리에 아래에 있는 거울에 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순식간에 이 공간이 현실에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두 사람의 증인처럼 말이죠. 그리고 화가는 거울 위에 문구 하나를 새깁니다.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다."라고요. 종교화 그리던 시절에 비하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상징을 찾아내기 위해 연구 중입니다.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그림 속 주인공 부부는 따지고 보면 참 많은 증인을 둔 셈입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리는 저 부부의 증인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그림(왼)<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2세>,1416-1492/123RF그림(오)<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를 따라서>,1998/plus au nord




 권력자들은 권세와 위엄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초상화를 주문했습니다. 실물보다 훨씬 미화된 모습으로 그려지기 일쑤죠. 




그림(왼), 15세기 르네상스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가 그린 공작 부부의 초상화입니다.  중세시대 그려진 초상화인데 부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구도입니다. 손이라도 맞잡을 듯 남편과 동등하게 마주 보고 있는 모습도 특이하죠. 뒷 배경이 원근법이 시도되어 있다는 것도 느끼실 겁니다. 우르비노 지역의 풍경입니다. 




우선 페데리코 공작의 얼굴상태가 남다릅니다. 공작의 매부리코가 더 강조되어 있죠. 부인은 흰 분가루를 칠한 가부키 배우들처럼  창백하게 표현되어 있고요.  남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 가장 성공한 용병 출신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입니다. 권력자의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1422년) 16세에 이미 용병 경력을 쌓고 있었고요. 19세에 군인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22세 우르비노의 군주가 되죠. 52세에 용병의 공을 인정받아 로마 교황에게서 공작 칭호를 받습니다. 





300명 기사로 꾸려진 용병부대를 이끈 그는 한 번도 싸움에서 패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용병으로 번 수익으로 우르비노 공국의 경제 기반을 닦습니다. 바티칸 다음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종합도서관을 세우고 많은 화가와 작가들을 후원합니다.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는 그가 용병으로 일한 밀라노의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조카딸입니다. 어릴 때부터 인문교육을 받아 지성과 덕을 겸비한 여성이었죠. 딸 여섯을 낳고 1472년 후계자가 될 첫아들을 낳았지만, 6개월 뒤 폐렴으로 숨지고 맙니다. 남편은 전장에 나간 상태였고요. 공작은 헌신적이었던 부인이 사망한 후 그림 주문을 합니다. 영웅적인 공작의 슬픈 사연을 듣고 화가 프란체스카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을린 피부를 통해 공작이 평생 안락한 궁전이 아닌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았던 군인임을 드러냅니다. 전장에서 다친 콧등이 심하게 내려앉은 매부리코도 영광의 상처로 그대로 드러내고요. 반면, 마상시합 때 잃은 오른쪽 눈은 공작의 감추고 싶은 과거이자 결점이라 한쪽 눈을 감출 수 있는 옆면 초상을 택합니다. 탁월한 선택이었고, 권력자의 마음을 잘 읽어 낸 덕분에 화가는 부가 보장되었습니다. 








그림(왼) 나무그늘 아래 루벤스와 그의 첫 부인 이사벨라 브란트>,1609/<루벤스와 아내> 페르디난도 보테로

출처: ARTLECTURE Contemporay Art





네로와 파트라슈의 이야기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 던 화가, 루벤스입니다.  꿈틀거리는 선과 드라마틱한 구성, 강렬한 명암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요소가 되지요. 그리고 루벤스는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바로크의 다채롭고 화려한 색채의 거장입니다. 활달한 운동감, 역동성의 대명사가 되었고요.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실질적인 고향은 플랑드르입니다. 1830년 벨기에라는 독립국으로 재탄생하며 루벤스는 벨기에의 국가적 상징이 되었고요. 가정의 평안, 직업적인 성공, 생전의 명성과 후대의 평가까지 모두 성취한 루벤스는 보기 드물게  미술사에서  가장 행복한 예술가로 불립니다.





1608년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안트베르펜에 돌아온 루벤스는 이내 고향에서 꿈을 펼치기로 합니다.  1609년 안트베르펜의 유명한 학자 가문의  사위가 됩니다.(첫 번째 부인)  그의 명성을 들은 플랑드르 총독 부부(스페인 왕가와 혈연관계였다)에 의해  궁정화가로 임명되고요. 성모마리아 대성당을 위한 제단화인 '십자가를 세움(1610')과 '십자가의 내리심(1614)'을 통해 북유럽과 이탈리아, 지중해 회화의 특성을 섞은 새로운 스타일 선보입니다. 구교의 반 종교개혁 운동에 걸맞은 새로운 종교화를 그릴 차세대 스타로 등극하면서 주문량이 폭증하게 됩니다.





급할 때는 정식 외교 루트를 건너뛰고 비밀 칙사로 국경을 넘나들며 칙서와 의중을 전달했습니다. 정부 고위 인사를 설득하는 민간 대사 역할을 맡아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데 공도 세웠고요.  예술가로서 탁월한 명성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다져온 인문학적 교양과 귀족의 습속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이 이런 성공의 주춧돌이 됩니다. 바로크 회화의 슈퍼스타입니다. 귀족의 시동으로 출발해 화가가 되지요. 르네상스가 쌓은 예술의 정수를 모두 흡수합니다. 플랑드르의 궁정화가를 넘어온 유럽의 화가로 불리고요. 예술가이자 외교관을 겸임한 당대의 셀러브리티입니다. 






첫 부인 이사벨라 브란트와 천생연분, 둘째 부인 엘렌 푸르망과도 찰떡궁합으로 살았습니다. 오른쪽 팔이 통풍이 걸려 고생하다 증상이 심장까지 퍼져 죽음을 맞았지만 60살 넘게 삶을 영위한 그의 예술 세계는 바로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스타일과 더불어 후기 풍경화에서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애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크고 넓고 깊었습니다. 





 페르난도 보테로의 패러디 그림을 보며 일부 비평가들은 말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거장들을 빌미로 지나친 명성을 누리다 떠난 작가라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보테로의 부풀려진 인물과 독특한 양감을 빌어 표현한 유머러스한 감각을 껴 입었기에   대중들은 스스럼없이  예술을 그들 가까이 머물게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근본도 없고 계보도 없어 후계자도 없습니다. 스타일이 강하니 아류작이 되어버리기 쉬워 후배화가들이 감히 따라가고 싶어 하지 않고요. 그래도 풍선처럼 부풀려진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보테로의 이 말 한마디는 꼭 기억할 것 같습니다. 


나는 내 길을 간다.


#<투우>,2006/조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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