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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내가 제일 잘 나가

안토니 반 다이크 & 존 싱어 사전트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강렬한 눈매, 사자느낌 물씬 풍기는 구레나룻, 머리카락보다 더 가느다랗게 한 올 한 올 그려 내린 꿈틀거리는 수염... 18세기 선비화가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앞에 마주할 때 들었던 느낌입니다.




허공에 얼굴만 떠 있는 듯한 파격적인 모습에 한 번 놀라고,  사자 갈퀴처럼 왜곡시켜 놓은 수염에 한번 더 놀랍니다. 초상을 뚫고 나오는 무장의 기운이 금방이라도 "이놈~"하고 호통을 칠 것 같아서 말이죠. 같은 시기 서양에는 렘브란트가 나이대별로 자화상을 많이 남겼습니다. 렘브란트 자화상의 공통점은 자신의 자의식을 담아낸  옆으로 살짝 각도를 튼 측면상이 대부분입니다. 반면, 공재 윤두서의 초상은 정면초상입니다. 입체감을 찾기 힘들어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초상화 기법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당쟁으로 어수선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공재 윤두서에게 30대는 휘몰아치는 폭풍우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관직 진출의 꿈을 접어야 할 정도로 말이죠. 송시열에 밀려 유배지에 머물러야 했던 윤선도의 후손이었고, 셋째 형이 당쟁에  밀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절친한 친구 이 잠 마저 당쟁에 희생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자화상을 그리며 공재 윤두서는 수없이 많은 질문과 비장한 다짐을 했을 겁니다. 선비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요.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잊지 않았으니까요.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함을 보입니다. 정치인이 아닌 지식인의 길을 택한 걸 보면 말입니다.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자신의 삶에 당당한 모습이 없으면 정면 자화상은 그릴 수 없다고요. '도도함, 당당함, 인간적인 따뜻함' 이런 것들이 모여 공재 윤두서의 정면 자화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시작해, 내 주변, 우리 국토, 주변국가, 그리고  우주로 점차 확장되고 깊어집니다.  






정치인들의 사무실에 가면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명암 같은 커다란 사진이 걸려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명인이나 힘 좀 쓰시는 분과 함께 찍은 사진말입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은 벽에 걸린 사진을 보며 자기 나름의 저울질을 합니다. '이분 잘 나가시는가 보다.'하고 말입니다. 



사진이 없었던 시절 이런 기능을 대신한 것이 초상화입니다. 17세기 초상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와 19세기 후반 초상화가의 대가로 알려진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의 작품들을 함께 실어 보았습니다.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는  플랑드르(네덜란드, 벨기에) 출신입니다. 부유한 비단 상인 아버지와 뛰어난 자수 기술로 유명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직물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습니다. 자연스레 이러한 지식을 그림에도 풀어냈고요.





반다이크는 천재로 태어난 모차르트 같았다.
-크리스토퍼 어파슬(소더비의 유화책임자)-





바로크 시대 스승인 루벤스의 아끼는 제자이기도 합니다. 만약, 안톤 반 다이크가 루벤스보다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바로크 시대 최고의 초상화가 순위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초상화의 새 지평을 열었으나 안타깝게도 1641년 마흔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스승인 루벤스가 죽은 지 불과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반다이크는 채색에 매우 뛰어났습니다. 탁월한 채색 기술로 빛과 인물의 움직임, 직물에 놓인 자수와 실의 짜임까지도 완벽하게 묘사해 냈습니다. 당시 귀족들의 의상을 사실적이면서도 완벽에 가깝게 화폭에 옮겨놓았을 정도로 말입니다.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는 19세기 후반 초상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피렌체 태생으로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미국 국적의 초상화가입니다.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 1836-1910), 토마스 에이킨스(Thomas Eakins 1844-1916)와 함께 3대 거장으로 소개되지요.  19세기 미국의 인상주의 10인 화가 중 한 명으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전통적인 형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활동을 하던 뒤랑 밑에서 다양한 기교와 명암법을 배웠습니다. 스케치 없이 바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들도 배웠고요. 여행을 하며 벨라스케즈(Diego Velazquez)와 할스 (Frans Hals) 같은 대가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주로 파리, 런던, 뉴욕의 상류사회 인물들을 묘사한 초상화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초상화는 섬세한 심리묘사가 중요합니다. 이부분에 탁월했 던  반 다이크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지요. 당시의 초상화는 일정한 공식이 있었습니다. 왕과 귀족들은 대개 갑옷을 입고 기사처럼 말을 타고 있었죠. 격식을 갖춘 화려한 옷을 입고 품격 있는 실내에 머물러 있는 모습으로 말이죠. 그런 설정들이 인물의 힘과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림1,찰스 1세 기마 초상>,1633/wikipedia그림2.<마담 X>,1884/wikipedia




 반 다이크는 이런 초상화의 공식들을 깨고 연극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꽃이나 지팡이 같은 사물을 들고 야외 배경과 어우러진 다채로운 인물화를 그려냈습니다. 그의 인물상들은 대부분 마르고 키가 크게 그려집니다. 그로 인해 예민하고 연약하면서도 어딘가 기품 있어 보이기 때문이죠. 




 사진이나 TV가 없던 시절, 유럽 군주들은 자기 모습을 담은 초상에 유난히 공을 들였습니다. 국왕의 초상은 국민 대부분에게 왕을 간접적으로 나마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주는 당대 최고 화가에게 초상화는 물론이고, 초상 속에 군왕의 위엄을 최대한 과시함으로써 자신이'하늘이 내려준 국왕'임을 만천하에 과시하려 애썼습니다. 




영국의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후계자가 없었던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는 원래 스코틀랜드 국왕이었습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위까지 물려받아 최초로 영국 통합군주가 됩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지 못했고, 이를 위해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했습니다.    



  

영국왕 찰스 1세는 어릴 적부터 병약해 160cm도 안 될 만큼 키가 작았습니다. 성격마저 내성적이었지요. 그는 자신을 위대하게 그려줄 화가가 필요했습니다. 루벤스 공방 출신으로 촉망받던 33세 안토니 반 다이크가 궁정화가로 낙점됩니다. 




찰스 1세는  빼어난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반다이이크를 영국 런던으로 초빙해 궁정화가 직위 및 기사 작위를 줍니다. 영국에 내세울 만한 초상 화가가 없으니 이웃 나라에 그림 장인을 수입해 온 거죠. 이때부터 반다이크는 런던에 머물며 찰스 1세를 비롯한 스튜어트 왕실 가족의 초상화를 다수 그리게 됩니다. 그로 인해 반 다이크는 자기 생애 주요 작품들을 영국에 남기게 됩니다. 플랑드르 출신임에도 영국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말이죠. 반다이크는 영국 회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200년간에 걸친  영국 초상화의 양식을 확립시키면서 말이죠.






그림 1. 반 다이크가 궁정화가로 임명된 이듬해 그린 찰스 1세의 기마 초상화입니다. 로마 시대 최전성기 황제들처럼 그를 강력한 지배자로 각인시킵니다. 말을 탄 모습으로 표현해 키가 훨씬 더 커 보이고요. 왕의 오른쪽 아래 붉은 옷을 입은 시종이 그를 높이 우러러볼 정도로 말입니다. 제 눈에 말이 더 주인공처럼 느껴집니다. 아무튼 왕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없었던 시민들은 이 그림을 통해 군왕다운 찰스 1세의 모습을 보고 땅에 고개를 조아리겠죠. 위로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테니까요. 




그러나 이 같은 당대 최고 화가의 솜씨에도 그림 속 찰스 1세 얼굴에서는 군왕의 참된 위엄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군주라기보다 군주 역을 어설프게 연기하는 배우처럼 보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이 초상의 주인공 찰스 1세가 의회와 반목을 거듭하다 마침내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을 일으킨 주인공이 됐음을 알려줍니다. 이 내전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에 패한 찰스 1세는 폐위됐고 1649년 1월 30일 처형되기에 이릅니다. 예술적인 감각은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군주 자리에 오르기엔 여러모로 현저히 모자라는 인물이었던 거죠.




뛰어난 초상화가였던 반다이크의 그림에서는 이처럼 숨기고 싶은 진실, 즉 '왕 답지 못한 왕'의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반다이크의 그림 속 말은 실물보다 훨씬  큽니다. 이 크고 온순한 말은 찰스 1세가 원하던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국민 이미지였겠지요. 그러나 당시 영국 국민은 왕과 신을 동일시하며 무조건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던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의회를 통한 합리적인 정치를 원했습니다. 정치 감각이 뒤떨어진 찰스 1세는 끝까지 그런 국민의 바람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얼굴에서 풍기는 우울함은 왕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믿었던 찰스 1세와 더는 절대왕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국민사이의 괴리감을 말하는 듯싶습니다. 그래도 그가 수집한 미술 컬렉션 상당수는 지금까지 영국 미술관이나 박물 간의 주요 작품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림 2. 사전트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 작품입니다. 프랑스 은행가인 피에르 고트로(Pierre Gautreau)와 결혼한 버지니 아멜리 아베뇨 고트로( Virginie Amelie Avegno Gautreau)라는 이름의 미국인 국외 거주자이고 마담 X로 알려진 젊은 사교계의 명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파리 최고의 초상화가를 꿈꾼 사전트는 더 큰 야망을 위해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그 무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같은 미국인으로 부유한 프랑스 은행가의 아내였던 사교계 최고의 미인 버지니 고트로(Vitginie Gautreau)에게 접근하여 초상화를 그리자고 설득합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고트로 부인의 초상화라면  살롱에서 큰 화젯거리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고트로 부인 역시 사전트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여 모델이 되기로 합니다. 





사전트는 대담하게 초상화 속 그녀의 어깨를 드러냅니다. 지금이야 헐리 웃 유명 배우들이 더 심한 모습을 하고 레드카펫을 밟는 모습을 밥먹듯이 보지만 , 19세기 프랑스는 신체를 많이 드러낼수록 밤일하는 직업여성으로 오해받기 쉬웠습니다. 당당하게 드러낸 어깨, 매끈한 피부를 노출시키고, 따뜻하고 부드럽게 완화시킨 브라운 톤을 배경으로 그녀의 두드러진 존재감을 생생하게 강조합니다. 다소 노출이 심한 코르셋을 입은 그녀가 자세를 취하고, 보석으로 장식된 얇은 끈이 달린 검정 새틴 드레스는 그녀의 놀라운 자태를 뽐내기 충분합니다. 그녀의 적갈색 머리카락과 화장한 얼굴색이 어우러져 현대적이고 귀족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을 세운 듯합니다. 





이 초상화를 그린 것은 사전트와 고트로 모두에게 도전이었습니다. 화가는 준비과정에서 몇 달 동안 고 트로에 대한 30개 이상의 포즈를 그렸고 그림을 완성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결국 그는 여러 번 구도를 변경한 끝에 그녀의 특징적인 옆모습을 강조하는 자세를 그리기로 결정합니다.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포즈를 사용한 거죠. 





1884년 파리 살롱에 열린 전시회에 이 초상화가 걸렸고 그로 말미암아 사전트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비록 그림의 모델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지요. 그들은 가슴이 깊게 파인 검은색 이브닝드레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조신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파격적인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나 봅니다.  게다가 지나치게 흰 살결로 인해 죽음을 연상시키는 피부색에 혐오감을 느꼈고요. 부자연스럽게 비틀어진 오른팔에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고트로 부인의 가족은 사전트에게 그림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전트는 살롱이 끝날 때까지 그림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1916년 후반에 "내가 그린 그림 중에 그것이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하면서 성공으로 간주하였지요. 아이러니하게, 사전트의 말처럼 그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이 사건을 계기로 사전트는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물 수 없게 됩니다. 







<영국 와 찰스 1세의 초상>,1636/www.mycelebs.com





한 화면 안에 세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세 명의 인물 모두 찰스 1세입니다. '삼중초상'이라 불립니다. 한 사람을 세 개의 다른 방향에서 그려 한 화면에 합친 겁니다. 이 작품은 벽에 걸기 위해 주문한 초상화가 아닙니다. 조각가에게 흉상을 주문하기 위해 그려진 일종의 밑그림 같은 겁니다. 17세기 영국 교회는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교황 우르바노 8세는 영국을 회유하기 위해 찰스 1세에게 흉상을 선물하려 했습니다. 





원래 흉상을 제작하는 데에는 손 부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 다이크는 작품에 찰스 1세의 손을 그련 넣어 이전의 삼중초상과는 차별화된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왕은 품위 있는 표정으로 자신만만한 눈빛을 띠고 있죠. 언뜻 보면 한 사람 안에 숨어있는 여러 자아로 분열된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베르니니라는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자기 동상을 제작해 준다는 말을 듣고 찰스 1세는 뛸뜻이 기뻐합니다. 그는 곧 최고의 화가 안토니 반다이크를 시켜 밑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반다이크는 찰스 1세의 얼굴을 부드러운 호남형으로 바꿔 놓습니다. 나중에 동상을 받아 든 찰스 1세는 감격했다고 합니다. 권력자의 초상은 사실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가 그리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다는 사실을 찰스 1세는 깨닫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림1<Queen Herietta Maria with Sir Jeffrey Hudson>,1633/National Gallery of Art

                      그림 2. <이자벨라 스튜어트 가드너의 초상>,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그림 1. <난쟁이 제프리 허드슨 경과 함께 있는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의 초상> 챨스 1세의 아내 헨리에타 왕비입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공주였고요. 다른 왕실의 결혼처럼 그녀 역시 정략결혼으로 영국 왕비가 되었습니다. 아름답고 풍성한 드레스와 은은하게 미소 짓는 미인의 모습으로 그려놓았습니다. 




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로 양보하지 못하는 부분이 종교문제였습니다. 찰스 1세는 영국의 국교가 된 성공회를 믿고 있었고, 프랑스 공주인 헨리에타 왕비는 가톨릭이었죠. 왕비는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개종하지 않아 영국 왕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일반인들도 성공회로 개종하지 않으면 출세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법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림 오른쪽에 황금 휘장에 고이 놓인 쓰지 않은 왕관이 보이시나요? 대신 사냥할 때 쓰는 검은색 채 챙 넓은 모자를 썼습니다.  




왼쪽으로 난쟁이 제프리 허드슨경도 보입니다. 당시 난쟁이는 유럽 왕실 가족에게 웃음을 주는 역할을 맡으며 궁정의 흔히 볼 수 있는 존재였다고 합니다. 원숭이와 같은 이국적 동물을 소유하는 것이 유럽 귀족문화에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원숭이의 의미는 방종, 음란함, 인간의 어리 석음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런 원숭이를 여왕 헨리에타가 살포시 누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육체적 욕망을 절제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라는 말이지요.







그림 2. 가드너 부인의 초상화는 사전트가 1888년 1월 보스턴을 방문하는 동안 제작되었습니다. <Madame X,1884>를 둘러싼 소란이 잠잠해지자, 사전트는 영국에서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곧 인기를 얻습니다. 사전트는 미국인들로부터도 초상화 주문을 받았는데, 그중에서 보스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설립했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의 주문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사벨라는 사촌이 구입한 플라멩코 댄서를 묘사한 <엘 할레오(El Jaleo)>를 보고 1882년 사전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에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합니다. 이 초상화는 보스턴의 세인트 보톨프 클럽(St. Botolph Club)에서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마담 X>에 비하여 이사벨라의 초상화는 품위를 지킨 그림이었거든요. 하지만 이 그림이 보스턴에 전시되었을 때, 이사벨라의 깊게 파인 옷은 물의를 일으켰고 그녀의 남편은 이 그림을 다시는 전시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간청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 초상화는 가드너 부인이 죽을 때까지 비공개로 남아 있던 고딕 방에 놓여 있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v2_ItAszm0





 




그림1.<Five Eldest Children of Charles1>,1637/Royal Collection Trust

                             그림 2. <Mrs Carl Meyer and Her Children>,1896/ The Jewish Museum





그림 1. 왕이 될 미래의 찰스 2세와 그 형제들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반 다이크는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는 메시지를 보는 이들에게 전합니다.  가운데 서 있는  꼬마 찰스 2세 보이십니까?  초대형견 마스티프종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있습니다. 앞선 기마상처럼 거친 말이나 맹견류들은 군주의 타고난 통치력을 드러내는 장치였습니다. 당당하게 개를 부리고 있는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찰스 2세가 '타고난 군주'임을 선전하는 듯 보입니다.  





그의 왼쪽에 있는 제임스 2세, 당시 귀족 남자아이들은 대여섯 살까지 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마치 공주처럼 보입니다. 그는 형과의 경쟁에 나서지 않는 섬기는 자세로 미래의 왕 찰스 2세에게 공손히 손을 모은 자세로 그려져 있습니다.  즉 반 다이크는 그림을 통해 왕이 될 인물은 찰스 2세라고 못 박은 것입니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왕정복고로 운 좋게 다시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무능한 군주로 남았고,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 영국은 입헌군주제가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1AIGsdBza8






그림 2. 사전트의 명성을 얻게 된 상류층 초상화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아델 메이어(Adele Meyer), 아들 프랭크(Frank), 딸 엘시(Elsie)의 모습입니다. 메이어 준 남작은 영국의 은행가 겸 다이아몬드 광산업자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Rothsxhild family)과 드 비어스 그룹(De Beers Group)과의 인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메이어 (Meyer)와 같은 부유한 부호들은 가장 돋보이고 매력 넘치는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방법을 찾습니다. 예술가의 흠잡을 데 없는 재능을 사용하여 엘리트 사회 내에서 그들의 부와 지위를 전달합니다. 사전트 같은 성공한 예술가들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는 방법으로 말이죠.





가족의 복장과 이미지 안에 포함된 가구는 18세기 영국의 화려함을 자아냅니다. 정교하게 무늬를 새긴 금색 소파가 부티 납니다. 메이어 부인의 무지갯빛 장미 비단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나온 것처럼 화려합니다. 사전트는 런던 상류층의 호화로운 일원으로서 그녀의 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호화로운 사치품들로 메이어를 에워쌌습니다.. 




사전트가 돋보이게 하는 세부사항들, 즉 소재들은 마치 반 다이크와 같은 가장 성공적인 올드 마스터 초상화가들이 사용한 방법에서 빌려온 듯합니다. 소파 뒤에서 어깨 위로만 드러내며 시야에서 주로 가려진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앞과 중앙에 메이어 부인이 배치되어 있는 것은 세 사람 사이의 가족적인 관계를 암시합니다. 메이어 부인에게는 아이들보다 주변환경의 매력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의 매력을 부각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존 스튜어트와 버나드 형제>,1638/조선일보




 반 다이크가 그린 '존 스튜어트와 버나드 스튜어트 형제의 초상화'속 인물들은 모두 스코틀랜드 출신 귀족이자 찰스 1세의 친척으로 공작이나 백작의 자리에 오르게 된 인물들입니다. 




왼쪽의 황색 옷을 입은 사람이 당시 17세의 형 존 스튜어트입니다. 청색 옷을 입은 사람이 한 살 아래 동생 버나드 스튜어트이고요.   높이가 2.4m에 폭이 1.5m 정도로 그림의 크기가 상당합니다. 그래서 그림 속 인물들은 실제 인물보다 더 커 보입니다. 



원래 2인 초상화 그리기가 어렵습니다. 균형감을 잡기가 힘이 들지요. 반 다이크의 이 그림은 형제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포즈에서 풍기는 자신감과 화려한 레이스 장식이 달린 의복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비단 특유의 광택과 매끈한 질감을 생생하게 표현했죠. 한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영국 귀족들이 반다이크의 그림에  열광했다고 합니다. 




형제가 황색, 청색, 대조적인 느낌의 옷을 입고 있는 데다 자세와 시선도 달라 은근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왼쪽 계단 위에 서 있는 형 존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동생 버나드는 한쪽 다리를 계단 위에 올리고 고개를 돌려 관객을 바라봅니다. 특히 허리에 왼쪽 손을 올린 버나드의 자세는 찰스 1세의 사냥하는 초상화 속 자세와 거의 똑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감 넘쳐 보이는 두 청년이 맞이할 미래는 빨간불이었습니다. 형 존은 왕당파의 기병대를 지휘하며 의회파에 맞서 싸우다 1644년 부상으로 사망합니다. 그의 나이 겨우 23세였죠. 버나드 역시 1645년 로턴 히스 전투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두 형제의 이 같은 비극적 운명을 그림을 그릴 당시 몰랐겠지요. 그들의 삶을 미리보고 다시 초상화를 보면 왠지 애잔한 마음이 듭니다. 








그림1.<제임스 스튜어트 리치몬드와 레녹스의 공작>,1633/에포크타임스 그림2. <Dr. Pozzi at Home>,1881/wikipedia




반다이크의 수많은 후원 자 중 한 명인 제임스 스튜어트는 리치먼드와 레녹스의 공작이었습니다. 찰스 1세의 사촌인 제임스는 왕과  귀족들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궁정의 침실 신하이자, 경비원, 국무위원 등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요. 1633년, 영국 최고의 기사 작위인 가터 기사로 임명됩니다. 제임스는 이 높은 영예를 기념하기 위해 반 다이크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제임스 스튜어트, 리치먼드와 레녹스의 공작>은 세계적인 걸작으로 남았습니다. 





이 그림은 매우 연극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림 속 제임스가 착용한 망토에는 은색의 커다란 별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보석이 달린 황금 훈장을 목에 걸고 있고요. 또 하나 그의 왼쪽 무릎에는 금색의 가터 장식이 옷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에 반사된 빛의 묘사는 그림 속 사물이 마치 조각처럼 보이게 합니다. 반 다이크는 이러한 연출을 통해 작품에 우아 함고 화려함을 연출해 냅니다. 그림 속 스튜어트가 입은 옷은 당대 패션계에서 최고로 여져긴 것들입니다. 스튜어트는 이 옷들을 여유롭고 우아하게 소화해 냅니다. 반 다이크는 그림 속 인물에게 이러한 여유로움과 우아함을 부여해 인물의 지위와 고귀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튜어트가 입은 옷의 레이스 장식입니다. 레이스는 당시 아주 고급스러운 소재로, 부유층의 초상화에서 강조되어 표현되곤 했지요. 촘촘한 붓으로 자국을 남기는 회화기법을 통해 사실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반 다이크는 어릴 적부터 익히 봐 온 직물에 대한 이해도를 장점삼아 다른 화가들보다 더 섬세하고 정확하면서도 우아하게 레이스를 묘사했습니다. 





스튜어트가 신은 신발 한번 보실까요? 프랑스식 디자인으로 높은 굽과 커다란 장미 장식이 돋보입니다. '웬 남성이 여성의 신발을...'라고  착각할 정도로 곱습니다. 발 모양에 꼭 맞게 제작된 신발은 당시 귀족들이 향유했던 복식 문화중 하나입니다. 그가 신은 양말은 가로로 주름이 져 있고요. 잘 정돈된 금발 머리와 시대의 유행을 반영한 핫한 의상으로 귀족적인 모습과 낭만적인 이미지를 연출해 냈습니다.





 빠지면 서운해할 또 한 가지!

 스튜어트 옆에 자세를 취한 개입니다. 이 개는 스튜어트가 멧돼지 사냥을 하던 중 위기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으로 유명한 그레이하운드 종입니다. 이 품종은 고귀함과 충성심을 상징합니다. 예술 작품에 개가 등장하는 것은 보통 충성심을 나타내는 의도로 사용됩니다. 반다이크는 앞다리를 우아하게 편 채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개의 모습을 통해 단순한 충성심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아함과 침착함까지 함께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개는 스튜어트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찰스 왕에 대한 스튜어트의 헌신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반다이크는 그림 속 인물의 복장, 자세, 주위의 사물이나 동물을 통해 인물의 성향과 특성을 잘 잡아낸 화가였습니다. 그는 초상화의 모델이 되는 인물에 대한 높은 이해와 애정을 그림 속에 이런 식으로 풀어냅니다. 







그림 2. 목과 손목에 하얀 리넨 레이스가 눈에 들어옵니다. 장식된 묵직한 트위드 재질의 붉은색 긴 실내복이 고급스러워 보이고요. 가운의 긴 옷자락 아래 양단 슬리퍼를 신은 발이 은근히 그의 취향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이 당당하고 잘 생긴 남성이 벨에포크( Belle Epoque:아름다운 시절) 시대 사교계의 인기 남이었던 의사 '사무엘 장 포치'입니다. 벨 에포크란 주로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프랑스가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 발전으로 번성했던 시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를 비롯해 여인들과 스캔들이 많았다고 해요. 유명한 < 마담 X의 초상>의 모델인 마담 고트로의 연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실내복의 끈에 살짝 걸친 왼손과 자연스럽게 심장 가까이 올려져 있는 긴 손가락의 섬세함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El Jaleo>,1882/wikipedia




스페인 집시 댄서가 플라멩코를 추는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특히 댄서의 격정적인 포즈, 일렁이는 조명과 그림자의 표현, 펄럭이는 검은 상의와 조명이 비친 흰색 치마의 강한 대비가 매력적인 사전트의 작품입니다. 초기 인상주의 느낌 물씬 풍겨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이라 싫어 보았습니다. 




 왼쪽 마루 바닥 쪽에서 빛을 받아 벽에 기댄 기타 연주자들과 댄서가 자신의 감정에 몰입하다 절정을 향해 치닫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실제로 공연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듯 현장감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초상화에 많은 해독을 끼친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반다이크에 대한 한 전문가의 비판입니다. 



초상화가 인간적인 깊이와 내면을 오롯이 드러내지 못한다면 포토샵이 잘된 선전용 도구에 지나지 않는 거겠지요. 작가님들은 오늘도 어떤 자화상을 그리고 계시는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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