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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회적 비판과 실존적 불안

오토 딕스 & 베르나르 뷔페


Bonjour Tristesse:Hello Sadness by Francoise Sagan ,1954/Redbubble




"나는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 <슬픔이여 안녕> 첫 문장/아르테-




"넌 사랑을 너무 단순한 걸로 생각해, 사랑이란 하나하나 동떨어진 감각의 연속이 아니란다.....' 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한 사랑은 모두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어떤 얼굴, 어떤 몸짓, 어떤 입맞춤 앞에서 문득 솟구친 감정...일관된 맥락 없는 , 무르익은 순간들이 내가 사랑에 대해 가진 기억의 전부였다. "그건 다른거야,지속적인 애정, 다정함, 그리움이 있지...지금 너로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안이 말했다.



안, 안! 나는 어둠 속에서 아주 나직하게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름을 불러 그것을 맞으며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프랑스와 사강 ( Francoise Sagan, 1935-2004)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estesse>(1954) 작품 속 기억에 남는 몇 개의 문장입니다. <슬픔이여 안녕>의 '안녕'은 헤어질 때 하는 인사인 ' Adieu'가 아닌, 양 볼을 갖다 대는 만날 때 안녕인 'Bonjour'입니다.



18살 , 주점 한 켠에 앉아 푸른색 노트에 생각날 때마다 적은 메모를 엮었다는 이 소설은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1913-1960)의 <이방인>(1942)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한 책 둘 중 하나입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한 장본인이기도 하지요. '사강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첫 작품이자 대표작인 이 작품으로 어린 나이에 성공적인 문인 생활을 시작합니다.



조선일보





반면에 사생활은 질곡이 많았습니다. 2번의 결혼과 이혼, 웬만한 스포츠카를 섭렵할 만큼 스피드에 광적으로 몰입해 죽임직 전까지 갔던 교통사고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약물중독, 마약중독, 도박까지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작품 활동만큼은 성실했습니다. 희곡, 소설, 시나리오, 에세이, 시 등 다양한 창작 활동을 했고요. 20편의 장편 소설, 3편의 단편소설집 등이 있습니다.





1958년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진 세버그( Jean Seberg, 1938-1979) 주연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본명은 프랑수아즈 쿠아레로 '쿠아레'라는 가족의 성을 가지고 활동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필명으로 '사강'을 사용했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 '사강 Prince de Sagan'에서 이름을 땄습니다. 파리 상류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여러 인물 중 한 명으로, 귀족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등장인물이지요.






줄거리를 살펴보면, 쾌락적이고 충동적이지만 행복했던 딸 세실과 아버지의 세계에 교양 있고 세련된 여자 '안'이 등장하면서 조금씩 그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안과 아버지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기 시작하면서 거침없이 그들의 세계에 침범하는 안을 견딜 수 없던 딸 세실은 그녀를 자신들의 세계에서 쫓아내 버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계획은 보란 듯이 성공하고요. 하지만 통쾌할 줄 알았던 그 계획은 세실에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감정하나를 툭 던지고 갑니다. 그 감정에 '슬픔'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리고 인사합니다.'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estesse'




사강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가 차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만의 선을 위한 이기적 행동이 아닌 타인의 처지나 상황을 고려한 행동이 먼저라고 얘기합니다. 혹여 문제가 생기더라도 지나친 죄책감으로 자신의 삶까지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위안이 될 수 있는 생각이면 가져다 다시금 삶을 긍정할 내공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슬픔에게 만나면 반갑다고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가 진정한 어른이라고 우리를 설득합니다.



오늘은 오토 딕스( Otto Dix, 1891-1969)와 베르나르 뷔페( Bernard Buffet, 1928-1999) 작품을 살펴볼까 합니다. 두 화가는 전쟁을 경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각각 독일과 프랑스로 국적은 다르고요. 오토 딕스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전했던 화가이고, 베르나르 뷔페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남은 자들의 피폐한 삶을 화폭에 옮겨 잠시나마 프랑스 시민들에게 사랑 듬뿍 받았던 화가입니다.








Gera Germany/Britannica




https://www.youtube.com/watch?v=TVsNe5SxpWQ






오토 딕스( Wilhelm Heinrich Otto Dix, 1891-1969)는 독일 게라 ( Gera) 출신으로 20세기 전반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판화가입니다.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예술과 친숙하게 자랐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시를 썼고, 사촌 프리츠 아만은 초상화 작가였습니다. 15세부터 조경 화가 칼 센트 밑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드레스덴 예술공예학교와 미술대학에서 공부하며 회화, 조각, 판화 등 다양한 분야를 익혔습니다. 1910년대 초에는 성실한 수련 과정과 실용적 교육을 거쳐 초상화, 풍경화 등 전통적 회화 양식을 섭렵했습니다.






딕스의 예술 세계에 결정적 전환을 가져온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1914-1918) 참전입니다. 그는 정신적 충격으로 금세 전장을 빠져나온 화가들(키르히너, 베크만, 그로스 등)과 다르게 자원입대한 후 서부와 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4년간 복무했습니다. 다섯 차례 부상을 입었을 정도로 전후 전쟁의 참화와 독일의 비참한 현실을 날것으로 그려냈던 화가입니다.





전장에서의 엽기적이고 처참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전쟁의 참상'을 평생의 예술적 주제로 집요하게 탐구하게 했습니다. 참호 속에서 일기를 쓰고 드로잉으로 전쟁을 기록한 의지 또한 그를 생존케 한 힘으로 여겨집니다. 그가 남긴 160여 점의 자화상은 얼마나 자주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성찰한 화가였는지 알려줍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이후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간 생명의 파괴, 신체의 손상, 전후 사회의 소외 등 트라우마적 이미지를 낳았습니다.






오토 딕스는 전후 '신즉물주의 (Meue Sachichkeit, New Objectivity)'라는 독일 미술 운동의 대표 작가로 자리 잡습니다. 처음에는 표현주의, 다다이즘, 입체파 등 다양한 현대미술 경향을 시도했으나, 전쟁 이후에는 감정적이거나 과장된 양식에서 벗어나, 차갑고도 객관적인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신즉물주의 미학을 확립했습니다. 신즉물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상흔,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적 혼란과 타락, 일상에 내재된 폭력과 불의를 날카로운 현실 인식으로 포착하는 미술운동을 말합니다. 당시 독일의 비참한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고요.





나는 거짓된 미화나 현실의 수정을 경계한다.
오직 실체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오토 딕스-






딕스의 예술은 반복적으로 전쟁과 인간의 비참함, 사회적 소외, 신여성, 도시의 타락을 주제로 삼습니다. 권위와 탐욕에 찌든 지식인층 등 당대 독일 사회의 민낯을 냉혹하고 때로는 그로테스크하게 작품에 담아냅니다.





나치 집권 이후 딕스는 사회비판적 작품으로 인해 '퇴폐미술'로 분류되어 교직에서 해임되고 수백 점의 작품이 압수 폐기되는 탄압을 겪습니다. 그럼에도 비밀리에 암시적 풍자화와 풍경화, 종교화를 제작하며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지켰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쟁과 인간의 고통, 종교적 갈망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예술은 미화나 변명 없이 인간의 고통, 사회의 비극, 시대의 진실을 날카롭게 증언하였으며, 신즉물주의 리얼리즘의 상징적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UntDpwGzdQ






France Paris/ Britannica






베르나르 뷔페( Bernard Buffet, 1928-1999)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구상 회화(표현주의)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전 생애에 걸쳐 8,0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20세기를 온전히 살아온 베르나르 뷔페는 모더니즘의 실험 속에 있었습니다.



모더니즘(modernism)은 기존의 사실주의적 구상화를 거부하고 원근법조차 무시한 추상화의 실험성을 강조한 사조입니다. 피카소 ( Pablo Piccaso )의 입체파 (Cubism), 달리( Salvador Dali)의 다다이즘 ( Dadaism), 르네 마그리트 ( Rene Magritte)의 초현실주의 ( Surrealism), 지아코모 발라( Giacomo Balla)의 미래파( Futurism)등 기존의 미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추상주의가 20세기 전반 전위 예술 ( Avant Garde)을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연약하고 소심했 던 뷔페의 미술성을 알아본 이는 따뜻한 성품의 어머니와 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파리에서 태어나 15세에 명문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 (Ecole des Beaux-Arts )'에서 미술의 기본을 익혔습니다. 1940-50년대 전후 프랑스 사회의 불안, 슬픔, 황폐함 등 시대의 정서를 강렬하고 직설적으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공포 속에서 살았다.
그 시절에는 먹을 것과
그릴 것만 찾아다녀야 했다.



그래서인지 이 시기의 그림들은 삭막하고 쓸쓸한 배경, 메마른 사람들 그리고 좌절하는 초상이 대부분입니다. 정교하게 뻗은 선, 날카롭고 각진 형태, 우울한 색조를 통해 전후 세대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해 냈습니다. 그는 고전적인 기본 구도를 버리고 독창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배경에 밀려 한쪽으로 치우친 정물화를 그리거나 검은 사선이 강렬한 깡마르고 주름진 얼굴과 몸매를 지닌 인물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이것은 기존 미술에서 위로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불안과 외로움을 대변해 주며 공감을 자아냈습니다.




Femme au poulet by Bernard Buffet ,1947/Artchive






1947년 (19세) 파리 비스콘티 갤러리 전시회에서는 유명인사가 된 피카소 ( 1881-1973)가 오로지 그의 그림 <닭을 든 여인 Femme au poulet>만을 보고 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파리의 시선은 외국인 출신이 아닌 자국민 출신의 뷔페의 등장을 환영했고, 피카소의 대항마로 불리며 이름 없는 젊은 화가를 산 정상꼭대기로 올려다 놓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전후에 프랑스 사람들은 불안하고 앙상한 인간의 피폐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뷔페의 인물화에 자신들의 삶을 투사합니다. 괴물 같고, 시체 같은 모습이 자신들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1948년 (20세) 파리 비평가상을 받으며 화단에 이름을 올리고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1955년 30대 뷔페는 프랑스인이 제일 좋아하는 화가 1 위에 선정되기도 하며 젊은 나이에 정상에 오릅니다.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재능 5인 선정
(패션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문인 프랑수아즈 사강, 베르나르 뷔페)
-뉴욕 타임스, 1958-




그해 여름 사강이 주최한 파티에서 사진작가 룩 포넬의 소개로 만난 가수 '에너밸 슈아브 Annabel Schwob, 1928-2005, 유대인,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재혼한 아버지도 자살하며 홀로 성장함)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여 그가 자살할 때까지 40년 이상 뷔페의 아내이면서 모델이 됩니다.





1971년 (43세)'레지옹 도뇌르' 프랑스 문화훈장을 받으며 20세기 최고의 화가가 됩니다. 전후 주류를 이루던 추상회화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성공한 화가가 되어 부를 누리고 화려한 결혼생활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면서 질투와 비난으로 정상의 삶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합니다. 소박한 그의 그림을 팔아 화려한 생활을 한다는 비난과 변함없는 그의 그림 스타일이 '게으르다'라는 말로 폄하되며 사람들의 시선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비난에 힘들어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풍경화와 광대시리즈 등 자신만의 그림을 고집합니다.




Bernard Buffet Museum , Shizuoka Japan




The Golf Japan







베르나르 뷔페는 동시대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 Jean-Paul Sartre,1905-1980)의 실존주의와 작가 알베르트 카뮈( Albert Camus, 1913-1960)의 부조리 사상에 공감하였습니다. 그의 그림들은 나치 점령 중 프랑스에 퍼져있던 '불안'의 감정을 표현하였고, 전후 구상 미술계를 지배하였습니다. 뷔페는 사회비평의 정신을 사실주의적 스타일로 그려내면서도 물감의 선택을 억제하고 검은색의 선들을 사용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창조하였습니다.





그는 '전쟁의 공포'시리즈와 수많은 거리 풍경, 각지고 감정 없는 표정의 인물화들로 유명했습니다. 자화상, 정물화 그리고 역사적, 종교적 주제의 그림도 다수 그의 작품 목록에 포함되어 있고요. 회화 외에도 석판 인쇄와 에칭 기법을 이용한 판화, 그리고 조각들로 다양한 주제를 표현하였습니다.




1997년 처음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후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지기 시작하였고, 1999년 새로운 밀레니엄 시작되려는 해, 오른 손목을 다치며 더 이상 그리기 어려워지자 10월 4일 애나벨과 산책을 마친 후 2층 화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Fyvo6dxUoU











이젤이 있는 자화상,1926/wikiart Portrait of by Bernard Buffet/ Sotheby's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양복과 리본 넥타이까지. 작업하는 화가라기보다는 말끔한 신사에 가까운 모습입니다(그림 왼쪽). 35세. 오토 딕스( Otto Dix, 1891-1969)는 나이에 비해 훨씬 조숙해 느낌입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라 그런 걸까요?





왼손에 작업 도구를 쥔 채 쏘아보는 듯한 눈빛이 날카롭습니다. 옷깃을 매만지는 오른손 모양이 1500년경 그려진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1471-1528)의 자화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뒤러는 자신을 예수처럼 묘사하며 신과 같은 창조력을 지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드러낸 적이 있지요. 오토 딕스 역시 독립적이고 꿰뚫어 보는 시선으로 작업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은 딕스입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가로서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현실, 그리고 개인적 내면을 동시에 응축해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진실을 꿰뚫어 보려는 예술가로서의 자기 다짐과 시대에 대한 증언자의 의지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드러난 모습은 자화상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자기 묘사를 넘어선 예술가의 숙명적 존재론과 시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자화상,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1500/위키백과








연예인 뺨치듯 잘 생긴 외모의 그는 왜 이런 날 선 그림들을 그렸을까?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 앞에 서면 드는 생각입니다. 흔히 '묵'톤이라고 표현되는 회색, 흰색, 흑갈색을 사용한 뷔페(Bernard Buffet, 1928-1999)의 자화상입니다. 선명한 검은색 윤곽선, 제한적이고 어둡고 탁한 색조, 그리고 강렬한 시선, 왜곡된 신체비율, 마른 얼굴, 퀭한 눈, 주름진 이마와 무표정 등 뷔페만의 독특한 표현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전체적으로 형태는 간결하지만 극도로 건조하며 각이 져 있습니다. 인물의 신체 일부는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보이고요. 이러한 선 중심의 기법과 어둡고 단조로운 색채 덕분에 극심한 감정의 고조, 내면의 상흔, 인물의 존재론적 고뇌가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납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뷔페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유지되는 조형 언어입니다






뷔페의 초상화는 단순한 사람의 외형이 아니라, 프랑스 사회 전체가 느꼈던 전쟁 이후의 허무와 공허,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고립감, 슬픔의 감정을 현대적 상징 언어로 변환한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는 추상미술이 유행하던 시대에도 인간 고유의 '감정'과 '내면'의 표출에 집중하며, 물질문명과 도시화, 전후의 혼란 등 현대문명비판과 함께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화두로 삼았습니다. 이를 통해 뷔페의 초상화는 보는 이에게 고독함, 인간성 상실, 절실함 등의 감정적 반응을 유도합니다. 존재와 삶에 대한 근원적 사유로 확장하는 역할도 하고요.





Buffet Experts(출처)








The Matchseller/wikipedia Hazel Stainer/wordpress.com
War Cripples,1920






오토 딕스의 < War Cripple>(1920) 작품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남긴 신체적 정신적 상처와 이후 독일 사회의 혼란을 극적으로 드러낸 그의 대표작입니다. 오토 딕스 자신이 전쟁 참전 용사로 참혹한 전쟁 경험을 직접 겪었던 화가입니다. 작품에는 실제 전장의 충격과 참상, 그리고 전후 사회가 부상 입은 군인들을 외면했던 냉혹한 현실에 분노와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20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1회 국제 다다 페어 ( First international Dada Fair)에 출품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사회 전반의 군국주의적 영웅담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시각을 제시했고요.




원근법이 거의 배제된 평면적 구도에 네 명의 참전 부상병이 프리즈 (고대 그리스 조각 띠)를 연상시키는 일렬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인물들은 군복을 착용했지만, 각자의 팔다리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습니다. 의수, 의족 또는 휠체어, 목발 등의 보조기구에 의존하고 있고요. 신체는 목재와 금속 인공보철이 결합되어 기계적인 측면이 강조되며, 이는 산업화된 전쟁이 인간 육체에 준 파괴와 재구성의 이중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배경에는 신발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병사들이 신발가게 (슈마허라이, Schuhmacherei)를 지나쳐가는 모습입니다. 딕스는 인물들의 외모를 그로테스크하게 과장해서 그렸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영웅적'이라는 신화와는 거리가 먼 존재임을 냉소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아래턱이 심하게 손상된 군인에겐 인공 턱이 붙어 있습니다. 두 다리가 모두 의족차림인 군인도 보이고요. 팔을 잃었거나, 각자 부상 부위는 다르지만 온전치 못한 모습입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쓸모없는 잉여'로 취급되어, 제대로 된 치료나 보상조차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상황으로 내몰렸습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차갑고 단조로운 색감과 각이진 선명한 윤곽선으로 묘사했습니다. 각 인물의 얼굴은 무감각하거나 자조적인 표정으로 일관되어 있고요. 전쟁 영웅의 이미지를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후 독일 사회가 직면한 복합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모습입니다.




War Cripples, drypoint/MoMA




한편, 딕스는 동판화 드라이 포인트(drypoint) 기법으로도 이 주제를 여러 번 해석했습니다. 섬세한 판화의 선묘를 통해 전쟁 부상자의 절망적 심정을 독특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신체의 불완전함과 사회적 분열, 당시 독일 도시의 음울한 분위기를 촉각적으로 시각화하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9ep7NwsNws










https://video.cascadepbs.org/show/antiques-roadshow/clip/antiques-roadshow-appraisal-1955-bernard-buffet-portrait







Portrait of the Journalist Sylvi von Harden ,1926/wikipedia




"당신을 꼭 그려야만 하겠소!
당신은 한 시대의 상징이오!"
-Otto Dix-






Sylvi von Harden/pinterest






20세기 초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변동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대표적 초상화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시인이었던 실비아 폰 하르덴( Sylvia von Harden)을 실제 모델로 삼아, 오토 딕스가 1926년에 나무 패널 위에 유화와 템페라 혼합 기법으로 제작했습니다. 현재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국립현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요.






모델인 실비아 폰 하르덴(Sylvia von Harden)은 1920년대 독일 사회에서 등장한 '신여성 (Neue Frau)'의 상징적 인물로, 그녀의 비전형적이고 개성적인 외모와 독립적인 태도는 전통 여성상과 차별화되는 '현대적 여성'을 대표합니다. 오토 딕스는 베를린 거리에서 우연히 실비아를 만나 그녀야말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에 실비아는 자신의 보잘것없고 기이한 외모에 대한 의문을 표했으나, 딕스는 외적 아름다움이 아닌 그녀의 '정신적 상태'와 시대의 변화상을 그려내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여러 상징적 요소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붉고 분홍빛의 단조로운 배경은 장식 없이 카페의 한 모퉁이를 연상시키며, 인물에게 강렬한 시선을 집중시키게 합니다. 다리를 꼬고 둥근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들고 있습 모습의 그녀. 붉은색과 검정색의 체큰무늬 하이넥 드레스. 그녀의 얼굴은 뾰족한 턱과 긴 코, 약간 벌어진 입술, 그리고 오른쪽 눈엔 당시 여성에게 보기 드문 남성적 상징의 단안경(모노클)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손가락은 유난히 길고 뼈가 도드라져 있으며, 짧고 남성적인 '보브 컷'의 머리, 팔의 각진 포즈, 어딘가 쓸쓸하면서도 당당한 표정이 특징입니다.






테이블 위에 'Slyvia von harden'이라고 쓰인 담배 케이스, 독수리 문양의 성냥갑, 칵테일 잔이 놓여 있습니다. 그녀는 결혼반지를 끼지 않고, 혼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상'을 강조합니다. 스타킹이 풀어져 다리까지 내려가 있는 등 숨기고 싶었을텐데 그녀는 그닥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자세입니다. 이런점이 기존의 여성상과 차별화되는 신여성만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인물 초상을 넘어 1920년대 독일 사회의 변모, 즉 1차 세계대전 이후 도래한 도시문화,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페미니즘, 성 역할의 변화, 자유로움과 동시에 불안이 뒤섞인 시대정신을 압축적으로 드러냅니다. 딕스는 이상적 미의 표현보다는 , 전후 독일인의 내면적 불안, 모순, 새로 등장한 신여성에 대한 사회의 반감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실비아 폰 하르덴이야말로 '한 시대의 상징'이라는 작가의 의도에서 보듯, 이 초상은 개인의 개성만이 아니라 그 시대 독일의 문화, 사회적 아이콘으로 기능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BlB8RAJEEc





이 초상은 1970년 영화 < Cabaret>의 오프닝과 클로징 장면에서도 재현되어 바이마르 시대의 상징으로 문화적으로 재조명되기도 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의 페르소나로 회자됩니다. 강한 존재감 과 논쟁적 시각 언어, 그리고 복합적인 사회적 의미 덕분에 지금까지도 많은 미술사가와 대중의 토론과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HkZWu9tgpw








https://www.youtube.com/watch?v=sVzwDRQ9CGQ






피에르 브르제 (Pierre Berge)와 베르나르 뷔페 ( Bermard Buffet)는 1949년경, 파리 카페에서 처음 만나 급속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이후 약 8년간 연인 관계이자 동반자로 지냈고요.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연인에 그치지 않고, 예술적 비즈니스 파트너 로서의 공고한 결합을 이루었습니다.



실제로 베르나르 뷔페가 전후 프랑스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시기, 브르제는 뷔페의 경력 관리, 작품 판매, 전시 기획, 대외 협상 등 예술 활동 외 모든 실무를 도맡아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브르제의 섬세한 전략과 지원 덕분에 뷔페는 창작에 보다 집중할 수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예술가로서 명성과 성공을 빠르게 쌓을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58년경 이브 생 로랑 ( Yves Saint Laurent)의 등장과 함께 종결되었습니다. 브르제가 이브 생 로랑과 새롭게 연인 및 사업 파트너가 되면서 뷔페와의 동반자 관계도 끝이 납니다. 결별 후 뷔페는 배우, 가수, 작가 인 아나벨과 결혼하여 남은 생을 함께 합니다.







Annabel buffet




Bernard Buffet and his wife Annabel with their Children/ Bridgeman Images







결혼 이후 아나벨 뷔페( Annabel Buffet, 본명 아나벨 슈보)는 베르나르 뷔페의 주요 모델이자 영원한 뮤즈가 되었습니다. 베르나르 뷔페는 아나벨을 주제로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녀를 중심으로 한 연작( 예: 'Trente fois Annabel Schwob'라는 전시)이 개최되는 등, 작품 세계에서 그녀의 존재는 지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나벨 역시 소설, 수필, 여행기 등 다양한 저작물을 집필하며 자신의 문학 활동을 이어갔고, 뷔페의 전시회 서문이나 책 표지에 글과그림으로 함께 협업하는 등 예술적으로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뷔페가 아내를 뮤즈로 삼아 예술적 영감을 받았듯, 아나벨도 남편의 예술 세계로부터 정서적, 창작적 자극을 받으며 활동 반경을 넓혔습니다. 작품과 전시, 책과 음악 등에서 활발히 협력하였습니다.





베르나르 뷔페와 아나벨은 예술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서로에게 깊은 안식처이자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각각 어린 시절과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받은 상처와 우울함을 공유하며,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정서적 교감이 매우 강했습니다. 아나벨은 현실적인 시각과 헌신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고 , 베르나르 뷔페는 평생 아나벨을 유일한 안식처, 소울메이트로 여겼습니다. 특히 베르나르 뷔페가 작품 세계와 명성에서 위기와 부흥, 혹평과 찬사를 오가던 힘든 시기에도 아나벨은 그의 곁에서 실질적인 지지자이자 동반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유대는 삶의 어려운 시기에도 큰 힘이 되었으며, 베르나르가 파킨슨병으로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어 투병과 우울로 괴로워할 때에도 아나벨은 곁을 지키며 그의 치열한 삶과 예술을 든든히 뒷받침했습니다.1999년 베르나르 뷔페가 파킨슨병 악화로 스스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4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아나벨은 남편의 사망 후에도 여러 저작과 회고를 통해 그의 예술 , 삶, 인간성을 세상에 기록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Bernard Buffet, intimately-Musee de Montmartre






Bernard Buffet and his wife Annabel / Getty images









selfportrait, 1912/Flickr selfportrait as Soldier,1914/ Reproduction Gallery





붉은 커튼 앞에 팔레트를 든 자화상 self-portrait,1942/Artchive



전쟁포로 모습의 자화상, 1947/ Arthur.io






오토 딕스 ( Otto Dix, 1891-1969)는 독일 미술의 아버지 알브레히트 뒤러 (1471-1518)와 전시에서 본 빈센트 반 고흐 ( 1853-1890)처럼 자화상도 자주 시도한 화가입니다. 구애나 사랑의 약속을 상징하는 카네이션을 들고 있는 젊은 시절의 모습이 보입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후 많은 청년들처럼 딕스도 멋모르고 군대에 자원입대합니다. 초상화 속 굵은 골격의 얼굴은 마치 시합 중인 권투 선수 마냥 부풀어 있는 모습입니다. 뒤쪽에 폭격의 섬광이 눈부시게 빛나고요. 그늘진 얼굴에 살기 어린 눈은 섬뜩할 정도입니다. 공격적인 붓질로 채색된 잿빛과 붉은 색조는 지옥 같은 전장의 분위기를 전합니다.




전쟁은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떤 거대한 것이다.
나는 절대로 이것을 잊지 않았다.
당신이 인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런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보았어야만 한다. ..
나는 삶을 가장 나쁜 면을 직접 경험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전쟁에 참여한 이유이자
내가 군에 자원했던 이유다."
-오토 딕스-





1915년 딕스는 서부 전선에 기관총 부대원으로 보내져 기나긴 참호전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1917년에는 동부 러시아로, 다음해는 플랑드르에서 싸웠습니다. 놀랍게도 딕스는 전장에서 600여 점의 드로잉과 구아슈 수채화를 완성했습니다. 4년간 다섯 차례 부상을 당했지만 살아남았고요. 하지만 끔찍한 전쟁이 남긴 상처와 악몽은 이후 화가의 작품에 여과없이 반영됩니다.





1933년 히틀러를 당수로 한 나치가 집권하면서, 딕스는 '퇴폐 예술가'로 낙인찍히고 탄압을 받습니다. 패전 후 군사보복을 외치던 우파 나치는 전쟁의 비극과 퇴폐적인 사회를 담아낸 딕스의 그림이 '독일 국민의 도덕적 감수성과 사기를 파괴'한다고 보았지요.



딕스는 1927년부터 일했던 드레스덴 아카데미 교사직에서 해고됩니다. 그의 작품은 1937년 '퇴폐 미술전'에서 비난받고요. 다음 해 작품 260여 점이 몰수되기도 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퇴폐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리도록 통제받게 됩니다. 게다가 딕스는 1939년에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옥살이를 하게됩니다. 작업복 차림의 물감을 들고 있지만 그는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날카로운 눈은 점점 힘을 잃아가고, 미간의 주름처럼 시름만 깊어 갑니다. 아이를 향해 바보 미소를 날리는 <가족 초상화> 속 그의 모습은 삶의 반전이자 희망같다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쟁 막바지인 1945년 오십이 넘은 화가는 나치 돌격대에 강제 징집되어 다시 전선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딕스는 곧 포로로 잡혔고, 다행히 그를 알아본 프랑스 병사의 지시를 받아 수용소에서 채플 제단화를 그리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 석방된 딕스는 몇 년 후 <전쟁 포로 모습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잠깐사이에 그는 절망에 가득 찬 노인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 기력이 쇠한 데다 가족과 생이별한 괴로움이 상당했을 것 같습니다. 비쩍 마른 얼굴에 깊은 주름과 잿빛 피부, 이제 그 날선 눈빛은 깊은 어둠으로 매워져 있습니다. 뒤쪽에 유령처럼 선 두 포로와 삐쭉빼쭉한 철조망이 비참함을 더합니다. 전후 딕스는 이전처럼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거친 붓질과 단순한 형식으로 표현해냅니다.






나는 아마도 광대로 기억될 것
-베르나르 뷔페-



A' la manie're de Bernard Buffet/blogosth-WordPress.com




베르나르 뷔페(Bernard Buffet, 1928-1999)에게 어릿광대 ( Clown, Pierrot)는 단순한 화제나 부차적 소재가 아니라, 그의 예술 세계 전체를 대표할 만큼 결정적 상징성을 지닌 주제입니다. 뷔페는 1950년대부터 어릿광대를 반복적으로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960년대 이후 수 십 년간 '광대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자신의 삶, 내면, 그리고 동시대 인간의 실존적 고통과 이중적 감정을 응축해왔습니다.





광대, 이것은 두려움이다.
그는 그의 얼굴에 그림을 그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베르나르 뷔페-




뷔페가 광대를 주요 화재로 삼는 이유는, 이 존재의 '이중성'에 자신의 예술인생이 겹쳐지기 때문입니다. 어릿광대는 무대 위에서는 관객을 웃기고 즐겁게 하지만, 화려한 분장 뒤에는 깊은 슬픔, 불안, 고독이 숨어 있습니다. 뷔페는 인간이 사회적 역할과 기대에 따라 자신의 진짜 감정과 상처를 감춘 채 살아가는 운명을 광대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실제 뷔페의 광대는 붉은 입술과 분장에도 불구하고, 눈에서는 슬픔과 고독, 때로는 불안정함이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뷔페는 자신이 평생 겪었던 대중적 갈채와 동시에 받았던 혹독한 비평,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흔들림과 내면의 공허함을 '광대'라는 상징을 통해 시각화했습니다. 그가 광대를 반복적으로 그린 것은 자신이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예술 노동에 평생을 헌신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늘 외부 세계의 시선을 의식하고, 불완전성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임을 드러내는 자기고백적 행위입니다. 심지어 직접 자신의 얼굴에 분장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광대 시리즈를 그려냈을 만큼, 뷔페에게 광대는 곧 자신의 자화상이자 내면의 투영체였습니다.






광대 시리즈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개인적 슬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의 폐허와 상실을 겪은 전후 프랑스 사회의 실존적 혼돈을 공감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광대들은 결코 웃지 않습니다. 날카롭고 건조하며, 비현실적으로 삐쩍 마른 인물로 묘사되고, 공허한 눈빛, 굳은 표정으로 그려집니다. 이는 단지 '광대' 한 명의 감정이 아닌, 시대 전체가 짊어진 아픔, 인간 존재의 공허와 불안을 시각화한 미술사적 증언이기도 합니다.









"미술가들은 진실을 수정하거나 개선하려고 하면 안된다.
그저 실체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오토 딕스-




The War, 1929-1932, 3단 제단화/Wordpress.com








약 3년( 1929-1932)에 걸쳐 제작된 대형 삼부작 (트립티크)회화로, 유화와 템페라를 혼합하여 목재 패널 위에 그려졌습니다. 작품 전체는 중앙 및 좌 우측의 3개 주 패널과 하단의 플레델라 (전례판, 아래에 가로로 길게 놓이는 화면, Predella)라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방대한 작업은 현재 독일 드레스덴의 갤러리 노이에 마이스터 (Galerie Neue Neister)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딕스가 1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참혹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의 비극과 인간성 상실을 적나라하게 시각화하고자 한 대표적인 반전 미술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참혹한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종교 트립티크 형식에 현대적 고발과 반성의 메시지를 결합한 대형 회화로, 냉정하고 객관적인 현실 묘사와 극적인 상징성, 깊은 사회비판 의식을 동시에 담아낸 20세기 미술의 불후의 명작입니다.






딕스는 참전 초기 가졌던 '전쟁 =정화'신념이 실전의 참혹함 속에서 완전히 박살나는 과정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이를 작품에 투영하여 전쟁 미화와 군국주의 부활에 경계의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색채는 주로 차갑고 어두운 갈색, 녹색, 무채색 계열로 죽음과 부패, 절망을 나타내고, 붉은색과 오렌지 색은 피와 파괴, 폭력의 순간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이렇게 제한된 색감은 작품에 냉정한 현실감과 중압감을 부여합니다.






왼쪽부분/Atlas Obscura






중앙 패널부분/The Irish Times






좌측 패널에는 안개 속에서 무장한 병사들이 전장으로 향해 묵묵히 행진하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개별 인물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며, 집단성과 비인간화, 전쟁의 숙명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중앙 패널은 도시의 폐허와 끔찍하게 훼손된 병사들의 시신, 찢긴 내장, 혈흔, 전쟁 잔해,등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화면 상단에는 해골 모양의 인물이 공중에 부유하여 오른쪽을 가리키고, 하단에는 가스 마스크를 쓴 병사가 참혹한 현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잘려나간 다리, 가시관을 닮은 철조망, 피에 젖은 손 등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을 상징적으로 연상시키며, 좌, 우측의 불타는 하늘과 검은 연기는 파괴와 죽음의 상흔을 극적으로 부각합니다.




오른쪽 부분/ Atlas Obscura





우측 패널에는 죽음의 아비규환을 딛고 부상자를 부축하며 뒤돌아오는 병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인물은 오토 딕스 자신의 자화상입니다.'피에타' 혹은 '십자가으 내림'장면을 암시하기도 하고요.절망과 구원의 긴장감이 공존하며, 인간적 연대와 마지막 남은 희망을 강조합니다.







하단 플레델라(전례판)는 참호 속 방공호에서 누워 있는 병사들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전장에서 죽음 혹은 잠시의 평화를 경험하는 방황하는 영혼, 무덤의 은유로 해석됩니다.




Matthias Grunewald , Isenheim Altarpiece, 1512-1516/wikipeida




https://www.youtube.com/watch?v=IpyS0rI2_tI










La Gorille, 1997/ Helene Bailly






< La Gorille>(1997)는 프랑스 현대 회화의 대표 작가 베르나르 뷔페가 말년에 남긴 대표적 유화입니다. 이 작품은 뷔페의 후기, 특히 파킨슨병 진단 이후 제작된 "유인원 시리즈"중 하나로, 고릴라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의 실존적 정체성과 고독, 내면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전달합니다.






날카로운 선묘, 각진 얼굴과 손, 표정이 사라진 듯한 무표정함, 그리고 생기 없는 시선은 뷔페가 전후 프랑스 사회에서 체감한 인간 존재의 불안, 허무, 그리고 내면의 고독을 고릴라라는 존재에 투영한 결과입니다. 이는 작가가 인생 말년에 파킨슨병이라는 질병과 죽음의 그림자를 직면한 심리적 신체적 고통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 뷔페는 '고릴라 '라는 유인원 이미지를 통해 인간 본성(원형)및 실존적 조건을 극적으로 대면합니다. 단순히 동물의 묘사에 그치지 않고, 인간 내면의 불안과 외로움, 존재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파킨슨병에 걸린 뒤 작업이 점점 어려워지던 시기에 그려진 이 시리즈는 자신의 신체적 쇠약, 죽음에 대한 공포와 집념, 그리고 끝까지 예술로 삶을 남기고 싶은 의지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METROPOLIS, 1927-1928/wikipedia Alamy








< Metropolis>(1927-1928) 작품이 그려지던 시기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후유증과 경제적 붕괴, 계급 간의 뿌리 깊은 불평등, 급격한 사회적 변화로 고통받던 시기로, 딕스는 전쟁 참전용사로서 겪은 현실과 신즉물주의 ( New Objectivity)운동의 관점을 바탕으로 당대 도시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중세 혹은 르네상스 제단화 ( altarpiece)의 삼부작(트립티크)형식을 현대적으로 차용한 작품입니다. 좌, 중앙, 우의 세 패널은 각기 분리된 사회 계층과 삶의 장면을 병치하여, 바이마르 시대 도시의 양극화와 불안, 도덕적 헤이, 계급 간의 소외현상을 극명하게 대비합니다. 각 패널의 개별적 장면은 서로 고립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불안과 욕망, 폐허와 쾌락이 얽힌 사회의 파편화와 긴장, 그리고 당대의 인간성 상실을 일관성 있게 보여줍니다.





좌측 패널은 도시의 어두운 하층부- 굴절된 다리와 의수를 단 상이군인, 허름한 옷차림의 하류층 창녀, 거칠고 불길한 분위기의 뒷골목을 묘사합니다. 저급한 의복과 피로한 표정, 바닥에 쓰러진 전쟁 부상자, 그리고 그들을 짖어대는 개는 사회의 무관심과 소외, 전후 참전용사 및 빈민층의 비참한 현실을 드러냅니다. 배경의 황폐함과 인물들의 격렬한 심리 상태는 도시의 그늘진 이면을 집약적으로 상징합니다





중앙 패널/Pinterest




중앙 패널은 화려하고 밝은 부도회의 내부, 즉 1920년대 베를린 나이트클럽의 쾌락적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부유한 상류층 인물들은 보석과 화려한 의상을 두르고, 한 쌍의 커플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붉은 톤의 배경과 재즈 밴드의 연주는 강렬한 생동감과 함께 도시 문명의 쾌락, 허영, 퇴폐적 분위기를 강조하며, 이곳의 인물들은 주변의 고통과 빈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과 몸짓을 보입니다. 특히 여성의 패션과 모습은 당시 '신여성의 당당하고 도전적인 이미지를 과장되게 묘사하여 성적 자유와 여성성, 그 이면의 중성적인 경향도 함께 표현했습니다.



우측패널/WahooArt.com







우측 패널은 상류 창녀들이 붉은 드레스와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 행렬하듯 지나가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가장 앞선 여성의 복장과 모피는 여성성 (특히 붉은 드레스와 목 부분이 여성성의 상징인 '음부'이미지를 연상시킴'을 노골적으로 암시하며, 그들이 지나치는 상이군인은 무심하게 외면당하거나 조롱받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뒤쪽으 로 건축물은 비현실적이고 혼란스럽게 왜곡되어 있는데, 이는 화려한 외관 뒤에 감춰진 도시 문명의 불안과 붕괴, 집단적 소외감을 나타냅니다.





극렬한 계층 분리,전후 사회의 도덕적,경제적 붕괴, 육체적 성적 상품화, 집단적 고립감 등 Weimar시대의 복합적인 도시 문제를 압축적으로 시각화합니다. 중앙의 화려함(쾌락, 자본, 자유)은 좌우의 빈곤과 트라우마(전쟁 상이군인과 여성의 피폐화)와 직접적으로 대비되며, 전체적으로는 인간 본성의 양면성-욕망과 파멸, 희망과 절망, 도시 문명의 진보와 퇴폐를 화면에 담아냅니다.




각 패널에 등장하는 창녀와 참전군인, 그리고 흉측하게 한쪽 구성을 바라보는 딕스 자신(작가의 자화상이 우측 모퉁이에 숨겨져 있음)은 이 세계의 관찰자이자, 시대적 양심을 상징입니다. 특히 여성성의 상징 ( 붉은 드레스, 과장된 곡선, 남녀 혼재적 패션과 태도)은 당시 '신여성'현상, 여성의 사회 성적 해방과 도덕적 논란, 성 상품화 문제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반면, 신체적 상흔을 지닌 전쟁 부상자들은 사회복지 사각지대와 애국심읠의 파탄, 영웅담의 허구성을 환기시킵니다. 또 삼부작이라는 미술사적 형식 자체가 전통적 '제단화 '구원적 장엄함을 차용하면서도, 종교적 구속 대신 현대 도시의 불안을 상징으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풍자와 아이러니가 묻어나는 작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8eawNfOgI0












Otto dix War Black & White stock photos/Alamy La Mort, 1999, #5, wikiart







< La Mort>(1999)는 죽음을 곧 현실로 받아들인 예술가가 자기 존재의 끝에서 그려낸 '마지막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칠고도 절제된 선, 삭막한 색채, 그리고 비어 있거나 결여된 인물들은 생의 유한성, 인간적 나약함 같은 존재론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뷔페는 단순한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넘어, 그림으로 자기 실존을 증명하려 했고, 고통이 예술로 승화되는 지점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습니다.





뷔페의 후기, 특히 < La Mort>제작기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내면지향적이고 극도로 절제된 색채, 형태, 주제 의식이 응축된 시기입니다. 그는 반복적으로 광대, 유인원, 죽음을 시리즈로 그렸으며, 이는 내면의 고통을 외적으로 풀어내려는 시도였습니다. 실제로 1999년 뷔페는 단 6개월 만에 24점에 이르는 '죽음'연작을 남겼습니다. 병마와 싸워며, 근육 경직과 손 떨림으로 심할때도 여전히 집착적으로 붓을 잡았다는 증언과 , 이를 영상으로 기록해 남겼다는 사실 등은 그 어떤 작품보다 '삶이 곧 그림'이었던 그의 예술가적 집념을 보여줍니다.





그가 생애 마지막 해에 남긴 연작, '죽음'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뷔페만의 강렬하고도 독특한 표현주의적 양식이 집약된 작품입니다. 화면을 구성하는 선들은 거칠고 날카로우며, 군더더기 없는 직선과 절제된 붓질이 전체 분위기를 지배합니다. 인물 혹은 대상을 마르고 앙상한 형태로 왜곡시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죽음 직전의 쇠약한 인간 존재 자체를 상징적으로 암시합니다.





색채는 짙은 검은색, 회색 등 무채색 계열이 주류를 이루어 작품 전반에 서늘하고 황량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 같은 어두운 색조는 작품의 비장성과 내면적 고통, 그리고 죽음이라는 테마의 무게감을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전체적으로 인물의 초점 없는 눈동자, 생기 없는 표정, 뼈만 남은 듯한 신체 등이 두드러집니다. 시각적으로도 이 그림을 마주한 관람객들에게 먹먹함과 함께 깊은 고민을 던져주는 작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0EUL_tS1_I




https://www.youtube.com/watch?v=iH20usYWgSU

https://www.youtube.com/watch?v=TAdvGUAJCaY&t=2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