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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쓰 Apr 15. 2024

햇살

카페로 오는 길 내내 앞서가던 차는 방금 세차를 한 것 같았다. 햇살이 부딪쳐서 꺾일 때마다 새하얗게 반짝거렸다. 봄이 오고 햇살이 닿는 곳들이 많아졌다. 사월의 햇살은 용케도 숨은 곳을 찾아내고 내 눈동자로 들어와 손끝으로 빠져나간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허상을 그리며 겨울눈을 녹였던 그 기억을 품고 나를 통해 다시 공기로 흩어진다. 햇살은 카페테라스에서 읽고 있는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하지만 행복해.'라는 구절 위에서 빛을 발하고, 눈이 부셔 찡그리는 사이 어느새 쨍하고 커피글라스 에지를 밟고 도약을 한다.


햇살은 옆 테이블 중년 남자의 굽은 등을 따스하게 덮어준 뒤에 갈색 머리카락을 아슬하게 타고 맞은편 여자의 주름선을 선명하게 비친다. 너무 하얗게 밝아서 60대로 보이는 그녀 얼굴의 주름이 평평하게 펴지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햇살은 플래시를 터뜨려 사진을 찍듯 그녀의 얼굴을 한번 더 환하게 밝힌 뒤에 잠시 바닥으로 떨어진다.


페이지를 한 장 넘기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햇살을 쫓는다. 빛은 시들어가는 꽃잎에도 있고 파릇파릇 돋아난 새싹에도 있고 계절과 시간의 먼지를 뒤집어써 군데군데 하얗게 벗겨진 낡은 벤치 위에도 있다. 시든 꽃잎은 그간의 생을 위로받고 새싹은 희망을 선물 받고 낡은 벤치에는 햇살도 앉아서 쉰다. 책을 테이블 위에 엎어두고 벤치로 가서 앉는다. 나도 따라 쉰다.


이름 모를 진분홍 꽃나무가 햇살 속에서 청초하다. 빛나던 시절이 떠오른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린다. 화장을 안 해도 눈이 부셔 보기에도 아까웠던 한 소녀가 빛 속에서 한들거린다. 노란 풀꽃을 닮았다. 그 아름다움을 기억하라고 햇살은 나를 벤치 위로 불러 앉혔나 보다. 그때보다 더 꿈이 많은 나는 마음이 반짝거린다고 햇살에게 웃어 보인다. 지금도 햇살, 너는 나의 꿈과 함께 하고 있다고.


윤슬로 부서지는 빛의 향연을 보고 싶다. 강으로 가야겠다. 여름이 되기 전에 해수면을 뚫고 바닷속으로 다이빙하는 햇살을 보고 싶다. 그 순간에 나는 시를 쓰고 싶다. 파르르 떨며 떨어지는 꽃잎을, 새싹이 돋아 초록빛으로 물든 봄에 신의 은총같이 내리는 빗줄기를 착한 글에 담고 싶다.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카페 마당에서 아들의 자전거를 밀어주는 젊의 아빠의 뒷모습에서 구부정한 할아버지를 본다. 어린 아들은 물속에서 빛나는 맑고 작은 조약돌 같다. 햇살은 그들에게 잠시 머물다가 시나브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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