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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쓰 Apr 28. 2024

낮잠

시원한 낮잠을 잤다. 몇 시에 잠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일어나 보니 저녁이 다 되었다. 새벽에 먹은 몸살약이 과했는지 낮잠이 들기 전까지 아득한 세상에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가끔은 멍하니 상대가 하는 말이 공기 중에 아지랑이 되어 가물거렸다. 눈을 떠보니 창밖은 해가 저물어가고 음악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한결 가벼웠다. 그렇더라도 이를 어쩌면 좋지? 낮잠을 몇 시간이나 자버리다니 득 보다 실이 더 많은 거 아닌가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여하튼 낮잠은 밤에 잤던 잠보다 더 개운하고 상쾌했다. 하루 중에 가장 맑은 상태가 되었다. 오늘 뭘 했더라... 커피를 한 잔 내리며 중얼거렸다. 병원에 갔었고... 아, 네일숍 다녀왔지. 그러고 나서 책을 좀 읽었구나... 먼 옛날이야기를 되짚듯이 찬찬히 시간을 거꾸로 셌다. 그러다가 들기름을 짜둘 테니 가지러 오라는 엄마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김치만두도 만들어주겠다고 보고 싶다는 말대신 짭조름하고 아삭하고 매콤한 엄마의 김치만두를 떠올리게 하셨다.


엄마는 지금 내가 어릴 때 살았던 고향집에 혼자 계신다. 그 집은 처음에는 마당이 있는 단층집이었다. 나중에 2층집으로 올렸는데 나는 그 뒤로 언제나 마당에 놓여있던 평상을 그리워했다. 햇살이 좋은 날에는 햇살이 좋아서 무더위가 기승인 날에는 그늘막이 있어 평상 위에서 뒹굴뒹굴 놀고 낮잠을 잤다. 바람이라도 살랑대는 날이면 머리카락이 간질간질 등을 대고 눕자마자 잠이 들곤 했다. 귀지 청소한다고 엄마가 귓속을 파내주는 날이면 기분 좋은 엄마의 손놀림에 그대로 잠이 들고 싶었던 날이 거기에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때만큼 달콤한 낮잠은 없었던 것 같다. 머릿속은 늘 무언가로 꽉 차있고 비워낼 것도 없는데 자꾸만 비워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수면도 부족한데 낮잠 한 번 잘 들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니 약 기운이 불러온 오늘의 개운한 낮잠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피로가 풀어져 그저 좋으니 사실 너무 쏟아지는 잠이 부작용이든 작용이든 상관없는지도...


낮잠을 잘 자고 나니 입맛도 돌고 귀여운 것은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은 더 사랑스러웠다. 몸이 가벼워져서 미뤄두었던 일들에도 눈길이 갔다. 우선 산만하게 놓여있는 데스크 위의 잡동사니를 주섬주섬 준비해 둔 케이스에 담아 한쪽으로 치우고 리넨소파와 쿠션을 툭툭 두드려 모양을 잡아주었다. 서랍장 정리까지 마치고 나니 마음까지 후련해졌다. 외출을 해도 멍하고 총기 없이 돌아다녔는데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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