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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전남 Oct 13. 2023

크루즈 어디까지 타 봤니?

가족여행의 출발인가 끝인가

어디 놀러 갈까 홀로 끙끙 앓고 있던 총각 시절,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여차저차 영화 공부를 하고 싶어 캐나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니 놀러 오라는 내용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즉흥적으로 여행을 할 사람을 따로 못 찾았다나, 뭐라나. 밴쿠버는 살기 좋은 도시지만 여행하기에는 크게 매력적인 곳은 아니지 않나. 그래도 왕년의 복싱 챔피언 '로키' 산맥에 올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훅' 타고 들어왔다. 밴프까지 캠퍼밴 타고 가서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모레인 호수를 배경 삼아 인생샷도 찍으면 좋겠다. 성수기 전이라 실속 있는 항공편도 마련했다. 기본적인 대화라도 해야겠는데, 알파벳이라도 다시 외워볼까.


비행 사흘 전, 친구 녀석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 '핫딜'이란다.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좋은 여행 상품이 워낙 저렴하게 나와 지나칠 수가 없었다는 거다. 이름부터 생소한 '크루즈' 여행이다. 크루즈를 타고 알래스카를 닷새 동안 다녀오는 루트인데, 1인당 60만 원으로 가능하다네. 게다가 술 빼고 모든 음식값이 포함된 금액이란다. 호호 할아버지들에게 어울리는 여행 아닌가, 멀미약을 얼마나 가져가야 하는 건가, 타이타닉보다는 안전하겠지. 에잇.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크루즈를 타겠어. 알래스카는 또 언제 가볼까. 그렇게 인생 첫 크루즈가 밴쿠버항에서 출항했다.


알래스카 '떨이' 크루즈 


사실 알래스카 크루즈 떨이상품에는 트릭이 숨어있었다. 중간중간 알래스카 주요 도시 또는 마을에 내리는데, 이른바 기항지에서 즐길 수 있는 관광상품이 마땅하지 않다. 선사에서 제공하는 관광상품은 비용이 꽤 비싸다. 도심을 걸으며 간단한 쇼핑을 즐기는 정도로 한나절 또는 반나절을 버티기가 어렵다. 보트를 타고 고래를 보러 가든, 열차를 타고 빙하 협곡에 다녀오든, 헬기를 타고 빙하 위 트레킹을 하든, 경비행기를 타고 항공샷을 찍든, 다 좋은데 비싸다. 그래도 별수 없다. 언제 또 알래스카를 오겠나. 비싸도 이런저런 상품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지...


풋풋한 신행 크루즈


두 번째 크루즈는 지중해 신혼여행이다. 알래스카 크루즈에서 얻은 경험은 아내를 설득하는 충실한 자산이 되어 주었다. 항공권을 감안해도 충분히 합리적인 예산, 알래스카와 달리 뚜벅이 도심 관광이 가능한 지중해의 특성만으로도 충분했다. 커다란 짐가방을 끌고 다닐 필요가 없다. 먹고 먹고 또 먹어도 추가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탈리아를 기준으로 지중해 서쪽을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크루즈 항로는 그렇게 훌륭하더라. 크루즈 관광의 기본 코스랄까. 이후에도 두 번이나 비슷한 코스로 크루즈 여행을 했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인천 → 밀라노 → 제노아(이탈리아) → 사보나(이탈리아) → 마르세유 → 바르셀로나 → 발렌시아 → 이비자(스페인) → 팔마 → 튀니스(튀니지) → 바레타(몰타) → 카타니아(이탈리아) → 칼리아리(이탈리아) → 나폴리 → 로마 → 인천 


벌써 한참 왔는데, 또 비행기 타고 간다고?


집에서 출발한 시간까지 포함하니 벌써 10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비행기 이코노미석에 쭈그리고 있다. 다이어트에 대한 의지를 샘솟게 하는 이코노미석의 비애도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징징대기 시작한 환브로가 더 큰 문제다. 빵빵하게 냠냠 기내식 먹고, 잔뜩 담아간 만화영화 두어 편 보고는 쿨쿨 잠들었지만, 비행시간이 너무 길다. 그나마 다른 승객들 잘 시간에 맞춰 잠든 게 고마울 따름이랄까. 지환이는 그나마 말이 통했지만, '미운 네 살' 려환이는 쉽지 않다. 흥분한 꼬꼬마를 들쳐 안고 엉덩이 팡팡으로 진정을 시켜본다. 최종 목적지는 미국 플로리라 마이애미... 댈러스를 경유하는 전체 비행시간만 꼬박 20시간이다. 20시간...


디즈니크루즈, 남는 건 사진


마이애미 숙소에서 정신을 차려 벽시계를 보니, 지금 시각이 '리오넬 메시'였다. 하하. 뻥이다. 당시 마이애미에 메시는 없었다. '지미 버틀러'도 없었다. 그럼에도 멀고 먼 마이애미로 향한 건 다름 아닌 '디즈니 크루즈'를 타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부모 세대의 추억팔이가 가능한 디즈니 크루즈다. 미키마우스와 도널드덕, 구피와 플루토까지 신난다. 재미난다 더 게임 오브 데스! 아직 어린 환브로에게는 인형탈 쓴 누군가가 하하 호호하는 것만 봐도 자지러진다. 물론 비싼 가격이 문제인데, 크루즈 승선 기간이 짧은 여정을 선택하면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수준이다. 돈은 쓰라고 있는 거고, 이왕이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투자에 쏟아부어보자. 덕분에 엄마, 아빠의 추억도 되살아 난다.




3년이 흘러 다시 지중해를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다. 제법 여행 짬밥 좀 먹어본 환브로는 어린이 전용 프로그램에 참전한다. 아는 영어라고는 헬로 (카봇)밖에 없는 꼬마들의 대찬 도전이지만, 친절한 크루들을 믿어보자.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이 올 거다. 그렇게 엄마 아빠의 여유로운 오후가 시자... 되려는 순간, 메시지가 날아온다. 아이들을 회수해 가란다. 언어 소통에 어려움을 겪은 환브로는 크루들이 진행하는 놀이프로그램 대신 게임기에서 시간을 보냈단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꼬꼬마는 엄마를 찾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제대로 된 해외 크루즈 여행을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살짝이라도 영어를 알려줘야 하려나.

김민재가 없는 2019년 나폴리


크루즈 여행을 다시 꿈꾸는 이가 있다. 어느새 크루즈 마니아가 된 환브로 엄마다. 여행에 대한 준비를 크게 줄여줄 수 있고, 돌발 변수도 많지 않다. 여행에 대한 고민거리가 줄어들다 보니,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그렇게 풍성해진다. 렌터카 여행도 아이들과 함께 수다를 떨 여백을 제공하지만, 아무래도 외국에서 운전은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엄마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환브로는 슬슬 크루즈 여행 졸업을 준비하고 있다. 무럭무럭 자란 꼬마들은 커다란 배에서 내려, 두 발로 열심히 걷고 싶다. 체력이 망해가는 부모와, 체력이 충만해지는 아이들은 이제 과연 어디서 타협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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