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집 사셨군요? 전 집 살래요”
"So many books, So little time"
- Frank Zappa -
언젠가 저 위대한 음악가 '프랭크 자파(Frank Zappa)'에 푹 빠져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혁신을 이야기할 때, 또 다른 혁신적 인물을 검색하다 알게 된 자파였다. 국내에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매력이 철철철 넘치는 인물이다. 한두 가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 열려있는 그의 모습을 오롯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멋지다'는 생각이 도무지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더라. 삶의 지향점을 제시해 준 자파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끼적여 보자.
일단 그가 남긴 수많은 명언 가운데 '독서 마니아'들을 흥분하게 만든다는 '너무 많은 책, 너무 적은 시간'을 끄집어내 본다.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저리도 많은데, 한정적인 시간이 야속하다는 뭐 그 정도 이야기일 테다. 이제 명언을 조금은 더 잘게 썰어 곱씹어 보면, 저 많은 책 가운데 어떤 책을 우선적으로 선별해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제기된다. 지금 이 순간 정말 내게 필요한 책을 찾아 읽어야, 말 그대로 시간낭비를 피할 수 있으니 말이다.
환브로에게도 독서는 중대 과제였다. 어떻게들 알았는지 아이들이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기 전부터 여기저기 책 장수들의 연락이 쇄도했다. 산부인과 또는 산후조리원과 어린이 서적 업계 사이에 어떤 어두운 연결고리라도 있는 건지, 아무튼 개인정보는 유출됐고 환브로에게 책을 사줘야 한다는 논리는 쉬지 않고 귓전을 때려댔다. 그것도 책 한두 권이 아니다. 많게는 수십 권에 이르는 이른바 '전집'에 대한 유혹이 유독 많았다. 어차피 살 책이라면 미리 한 번에 사야 저렴하다는 논리는 나름 설득적이었다.
결론적으로 첫돌 전부터 아이의 방에는 책장이 들어섰고 여러 어린이 도서 시리즈가 자리를 잡고 위용을 뽐내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책이 필요한가라며 지갑을 꽁꽁 싸매보았지만, 책 장수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통한 우회 공격에 능했다. 자식 사랑보다 손주 사랑이라더니.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주를 위해 책값을 치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세계 명작 동화는 기본이고, 위인전 사랑도 여전했다. 아이들에게 무조건 먹힌다는 공룡과 우주를 위시한 과학 백과사전도 빠질 수 없었다. 책을 둘 곳을 찾아, 이사를 고민해야 할 상황이라니.
하지만 당연하게도 환브로가 책을 읽는 건 불가능했다.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갓난아기 때는 물론이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를 곁에 눕혀두고는 엄마, 아빠가 번갈아 책을 읽어주는 게 전부였다. 환브로는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집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같지만, 아마 부모의 욕심이 부른 기억의 왜곡일 테다. 책을 덮기 전 ‘사랑해'라고 속삭여줬을 때마다 샤르르 피어오른 환브로의 미소만큼은 진실이었지.
어린이집에 다니며 한 글자씩 한글을 읽기 시작했지만, 환브로가 책을 가까이하는 일은 딱히 나타나지 않았다. 주변에 어떤 집 아이는 종일 책만 붙들고 산다는데, 이미 수십 권짜리 전집을 다 읽고 새로운 책을 찾는다는데... 환브로는 책과 담을 쌓은 것이 분명했다. 일단은 꾸준히 책을 들이밀어 넣어 봤지만, 환브로는 그림이나 사진 감상하기에 바빴다. 돌이켜 보면 글씨 하나 읽기 벅찬 시기에 책을 술술 읽는 것은 애초에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대체 주변의 그 어떤 집 아이는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주말이면 주섬주섬 짐가방을 챙긴다. 솜씨 좋은 엄마표 도시락을 맛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기띠'에 환브로를 탑승시키고 근교로 나들이를 떠난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금세 책에서 본 사진들이 당장의 눈앞에 펼쳐진다. 작은 책에서 감히 느끼지 못한 커다란 실제 세상에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나라가 굳이 따로 필요할까. 눈부신 햇살과 따사로운 햇볕, 재잘대는 새소리에 향긋한 꽃내음까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오감을 자극하는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나들이나 여행이 어려운 때는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환브로의 책이 되어 주었다. 글씨를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 꼬꼬마를 위해, 일단은 자막 대신 우리말 더빙판을 즐겼다. 누군가는 외국어 교육을 위해 더빙판을 지양해야 한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이야기를 담아냈느냐였다. 한글 자막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정도라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의미를 굳이 포기할 필요가 없었을 테다. 환브로가 글을 읽고 이해하는 속도가 빨라진 이후에는 더 이상 더빙판을 찾지 않는다.
중학생이 된 지환이는 이제 책을 꽤 많이 읽는다. 자의 반 타의 반 책과 담을 쌓은 지환이를 독서의 세계로 인도한 건 초등학교 4학년쯤 만난 역사 만화책이었다. 그러고는 환경, 음악 등으로 영역을 서서히 넓혀나갔다. 관련 다큐멘터리나 TV 프로그램을 곁들이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반면 려환이는 아직이다. 슬슬 발동이 걸리는 것도 같지만 아직은 간접체험보다 직접체험이 좋은 걸 어쩔 수는 없다. 역사 만화책을 조용히 건네도 조용히 옆으로 밀어둔다. 이미 비슷한 시기를 보낸 지환이는 '사람마다 다 때가 다르고, 좋아하는 분야가 다른 거야. 조금 기다리면 다 때가 올 거야'라며 키득거린다.
그리고 며칠 뒤 저녁 식탁 겨울방학 때 무얼하고 놀 것인가 진지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런데 나름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려환이 내어놓은 놀이가 독서였다. 당장 지환에게 연락해 '아빠의 미래'를 점쳐달라고 하려다 참았다. 정말 때가 있긴 있나 보다. 려환은 친구들과 비교해 자신의 문해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문해력이란 단어는 또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또 어떤 기준으로 비교를 당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귀엽다. 떡볶이 먹으러 놀러갔다 발견한 두꺼운 책이 한 권 있는데, 그 책을 방학 동안 완독하고 싶다더라. 책을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눈을 끔뻑이는데, 영락없는 4학년 지환이다.
아이가 책을 읽든 영화를 보든 잊지 말아야 하는 부분은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의 간접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책 한 권 던져주고는 알아서 잘 읽겠지 생각하는 건 방치다.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는 건, TV에 빠져 홀로 생각하고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TV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TV가 독서에 밀릴 이유가 딱히 없다. 아이에게 책을 권하기 전 부모가 먼저 책을 읽어보자. 책이 지닌 사전적 의미 이상의 가치가 솔솔 피어날 테다.
물론 어떤 책을, 어떤 영화를, 어떤 프로그램을 대면하느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다. 때가 되면 아이 스스로 알아서 하는 시점이 오겠지만, 당장은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다. 응원과 격려 정도라고 말해두자. 뭔가 더 있어 보인다. 지환이에게 그러했듯, 려환이에게도 그렇게 적정한 콘텐츠를 슬쩍 밀어넣어본다. 려환이가 직접접 골랐다는, 저 읽고 싶다는 두꺼운 책도 꼼꼼히 살펴볼 예정이다. 려환이 걱정 대로 너무 두꺼워 못 읽을 수도 있으니까. '짱구'를 좋아한다고, 극장판 '짱구'의 긴 러닝타임을 꼭 견딜 수 있는 건 아니다. 조금 기다렸더니, 금세 때가 왔다. 환브로와 손잡고 동네 서점으로 향할 그 때가 왔다ⓚ.